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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2005)

독서일기/국내소설

by 태즈매니언 2014. 1. 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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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로 유명한 작가라는데 아직 그 책은 못 읽어봤다. 2005년도에 나온 이 소설집은 아홉 편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다. 모두 다 1인칭 시점에서 씌여진 책이고, 고전문학 또는 기록된 역사에 대한 재해석 또는 현재와의 평행나열로 진행된다. 


자신이 출판한 다섯권의 소설 중 가장 나중에 읽기를 권한다는 5단계의 작품이라서 그런지 어렵지만 흡입력이 놀랍도록 뛰어나다. 쉽게 읽고 잊어버릴 책이 아닌듯해서 아껴가면서 읽었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뿌넝숴(不能說)>

<거짓된 마음의 역사>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19p.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은 대부분 스캔들에 휩싸인 영화배우가 서둘러 차에 올라타면서 진실은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들을 향해 내젓는 단호한 손짓 이상의 의미를 띠지 못한다.

 

21p.

 

나는 태어나기를 따분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차를 몰고 가더라도 도로는 보지 않고 좌우의 차선에 더 신경쓰는 사람이다. 남에게 칭찬받을 수 있는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잘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칭찬받기 어려운 일을 혼자서 결정해야만 할 일이 생기다면 당장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다. 나같은 종류의 인간은 절대로 농담을 하지 못한다. 농담을 잘 못할뿐더러 남의 농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따분한 인간이니까 남는 시간이면 역사책이나 들여다보면서 소일하는 셈이다. 역사책에는 농담이란 기록돼 있지 않을니까. 원인과 결과만이 나열된 책이니까.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37p.

 

모든 역사란 일어날 만하니까 일어난 일들의 연속체를 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일단 어떤 일이 일어나면 저마다 반드시 일어날 만한 일이었다는 증명서가 자동적으로 첨부된다. 아무리 봐도 그 증명서를 찾을 수 없는, 그러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자신의 진실과 이어난 일의 진실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43p.

 

쓰기야마 토시란 광고영화 제작자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이런 쪽지를 남기고 자살했다. '부자도 아닌데 부자의 세계를 어찌 안담.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한 세상을 어떻게 그린담. 가진 꿈이 없는데 꿈을 어떻게 판담... 거짓말은, 들통나게 마련인데.' 나는 진실을 알고 싶었다. 역사학이란 내게 진실에 다가가는 도구였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나는 거짓말이 들토나는 게 아니라 들통난 것들이 거짓말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52p.

 

"여기까지 쓰고 나니 어쩐지 불만족스럽다. 자신이 연루되어 있는 과거의 기억들을 다루는 데 역사가가 여느 사람들보다 정말로 유리한 입장에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불리한 입장에 있지 않나 싶다." 나는 조르주 뒤비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삶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불리한 입장에 놓인 역사가와 같다. 하찮은 사실들은 어쩔 수 없이 엄숙하고도 중요한 양상을 띠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뿌넝숴(不能說)>

 

70p.

 

지평리전투에서 죽은 인민지원군의 숫자는 5천명에 달했다네. 그 처참한 광경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뿌넝숴. 뿌넝숴. 역사라는 건 책이나 기념비에 기록되는 게 아니야.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몸에 기록되는 거야. 그것만이 진짜야. 떨리는 몸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말해주는 게 바로 역사야. 이 손,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잘려나간 이 손이 진짜 역사인거야. 생각해보게나. 조선전쟁이 일어난지 일백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나라로는 한때 우리가 괴뢰군이라고 부르던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지 않는가? 지평리에서 죽은 병사들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린 셈이지. 고작 일백년도 지나지 않아 망각할 그런 따위의 사실을 기록한 책과 기념비라니. 그게 바로 지금 자네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아닌가? 그런 책 따위는 다 던져버리게나. 내 손보다도 못한 그따위 책일랑은. 나는 죽고 나서도 이 손가락의 사연은 잊지 못할 거야. 바로 이런 게 역사란 말이야.

 

76p.

 

왜 사람들은 책에 씌여진 것이라면 온갖 거짓말을 다 늘어놓아도 믿으면서 사람이 말하는 것이라면 때로 믿지 못하는 것일까? 인간의 운명과 역사란 결국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드에 온몸과 온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일이라는 걸 알지 못하고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에만 빠져 있는 것일까? 몸소 역사를 겪어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뿌넝숴라고 말해도, 역사를 만드는 자들은 거기에다가 논리를 적용해 앞뒤를 대충 짜맞추고는 한 편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사람들은 기념관에 가서 구경하지.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고.

 

 

<거짓된 마음의 역사>

 

103p.

 

어떤 점에서 귀하의 미합중국과 제 미합중국이 절대로 하나일 수 없는 상상의 소산에 불과하듯, 은자의 나라에서 찾은 제 진실한 사랑 역시 사라져버린 그 하루 같은 것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제 인생에서 실제로 하루가 사라졌든 아니든, 우리가 진짜로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는 상상하는 대로 구성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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