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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목] 한국의 도시 60년의 이야기 1-2(2005)

독서일기/도시토목건축

by 태즈매니언 2017. 12. 11.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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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의 달인'이라는 별명은 고건 전 총리를 지칭하는 말로 굳어졌지만 나는 이 별명을 작년에 작고하신 고 손정목 전 교수님에게 돌리고 싶다. 내 가족은 부모님이 모두 공무원이시고, 동생들과 그 배우자까지 모두 공무원인 골수 공무원 집안이다. 2013년 <서울 도시계획이야기>를 읽기 전에는 공무원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컸다. 특히 건축직은 업무를 전혀 모르면서 그저 인허가비리를 떠올렸고.

손교수님의 저서들은 해방 이후의 남한 (서울 중심이긴 하지만) 도시사 계의 삼국유사와 같은 느낌을 준다. 1928년 생으로 1970~77년까지 도시계획 분야의 국장급 공무원, 시립대 교수,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위원,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등 도시계획과 개발의 현장에서 본인이 지켜보고 들었던 내용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논문이나 학술서에 인용할 수는 없는 야담들도 채록해서 후세에 전해주시는데 당시를 살던 많은 분들이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에 하나하나의 에피소드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카이사르의 내란기처럼 자신을 3인칭으로 서술하는 부분이 나올 때는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고. ㅎㅎ

이 책은 제목의 내용과 달리 공주, 과천, 성남, 익산, 세종 정도만 다루고 있다. 다른 저서에서 이미 서술하셨던 이야기, 앞에서 나왔던 이야기가 고스란히 반복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원래 할아버지 이야기는 했던 이야기 한 번 더 듣는 재미가 있으니 그것도 듣는 맛이다.

다 읽고 난 소감은 '한국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지금까지 한반도 남쪽에 배수진을 친 전쟁 중이구나.'라는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도시계획, 산업정책 모두 북한이라는 존재, 가끔은 그 존재의 도발행위 자체로 계속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한반도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생존에 대한 보장이 없는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지독하게도 노력해왔다. 다들 합리적인 개인으로서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한 배를 탄 해군처럼 전쟁이 나면 공동운영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게 급속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고. 요즘 상황을 보면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로 인한 긴장조성으로 인해 우리는 아직도 배수진을 친 상태고, 삶은 달걀을 어느 쪽부터 깨서 먹어야 할지를 차분히 토론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영동개발, 와우아파트 붕괴, 전차의 철거, 인왕북악스카이웨이 개통, 평창동 주택지 개발, 북악터널과 남산1호 터널, 광주대단지 사태, 행정수도 이전, 독립기념관과 계룡대 및 정부대전청사의 입지 결정, 청량리 롯데백화점의 원건물, 신도시의 건설 등에 대한 이바구를 듣다보면, 1960년 센서스 기준으로 서울시 내에서 수세식 화장실의 보급률이 0.6%에 불과하던 시절의 나라를 이렇게 발전시킨 분들에 대해 다시 한 번 고개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리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군생활 후배보다 국가의전서열이 낮은 걸 참을 수 없다고 서울시장을 내무부 소속에서 국무총리 직속으로 옮기고,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장과 몇명의 국장이 결정하고 1주일 후에 기공식을 하는 시대에서 벗어난 대신에 트럭을 이용한 폭파 운운한 청사모의 대활약(?)으로 인한 KTX오송분기점, 충청권 급조공약으로 탄생한 세종시, 새정부 첫 예산안 통과의 대가인 호남선KTX 2단계사업 무안공항 S라인 경유의 시대를 살고 살고 있다. 누가 누구를 악마화할 자격이 있나.

경부고속도로가 천안시 중심가를 관통하게 된 이유, 호남선 철도를 놓을 때 경부선과의 분기점을 왜 조치원 분기로 하지 않고 대전분기로 했는지(그랬으면 조치원광역시가 됐을듯), 일제시대 전차-버스 무료 환승제도, 서울교통공사의 지하철건설부채가 왜 이리 막대한지, 박정희 시대 행정수도 이전 검토와 그 유산 등(현재 본좌가 거주하는 곳은 대평지구에 이름을 빌려준 금남면 대평리 ㅋㅋ), 서울지하철 3-4호선을 대우가 민자사업으로 할뻔한 이야기(양갓과장님 주식회사 대우지하철 과장으로 입사했을지도 ㅎㅎ), 대규모 재난복구에 대한 모범적인 리더쉽 사례였던 이리역 구내 폭팔사고 수습(이 때 활약한 황인성 전북도지사는 교통부 및 농림수산부 장관과 아시아나항공 사장회장을 거쳐 역대 유일한 정규교육 초등학교 출신 국무총리가 됨), 과천시에 경마장과 서울대공원이 생기게 된 연유 등이 궁금하신 분들은 이 책을 보시면 된다.

최근에 <유신과 중화학 공업: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을 봤던 게 이해에 도움을 줬다. 고인께서 작고하시기 전에 남긴 마지막 저서인 <손정목이 쓴 한국 근대화 100년>도 읽어봐야겠네요. 이 책을 읽으실 분들의 꿀잼을 빼앗지 않기 위해 인용하는 건 권 당 한 구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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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243쪽

일제시대에는 일본군 제20사단의 사격장이었던 이곳 용산동 2가 일대에 해외에서의 귀환 동포, 이북에서의 월남 동포들이 들어가 정착한 것은 광복 직후부터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한두 동이었던 것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서너 동씩 더 늘어난 것이 마침내는 마을을 형성하였고, 해방촌이라고 불렸다. 8.15 덕에 생겨난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중략)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이 체결되기도 전인 1952년 하반기경, 아직 시민 대다수가 피난지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는데 유독 해방촌만은 활기를 띠었다. 전쟁 전부터 살던 주민들이 재빨리 돌아와 정착한 데다가 더 많은 새 난민들이 들어와서 판잣집을 짓고 정착했기 대문이다. 이렇게 주민 수가 늘어나자 파출소도 생겨 그 이름이 용산경찰서 해방지서였고 개신교 해방교회라는 것도 생겼다. 그리고 그들 수만 명주민 대다수의 주소지는 한결같이 용산동 2가 산 2의5였으니 하늘 아래 둘도 업는 고밀도 저질 환경이 창출된 것이었다. 해방촌은 국내 최초의 무허가 건물 집단마을이었다.

2권 63쪽

분명히 1979년은 행정수도 건설을 추진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독립된 행정수도를 건설할 수 없다면 차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고민을 거듭한 끝에 박 대통령이 착상한 또 하나의 방안이 있었다. 이미 대도시로 성장한 대전에 순수 중앙행정 기능만 옮기는 방안이었다. 다행히 당시의 대전에는 그동안 군부대가 점용해 온 탓에 전혀 개발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온 공지가 있었다.87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방대한 공지였다. 훗날 둔산지구라고 불리게 되는 이 지역의 일부에 중앙정부 기능이 들어갈 계획을 세워보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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