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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허호 역] 도쿄이야기(1983)

독서일기/일본

by 태즈매니언 2018. 1. 16.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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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 전공자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 교수님의 도쿄의 근대화와 그 과정에서 조금씩 변모하며 사멸해간 에도의 유산들에 대한 밀도높은 에세이입니다. 도시사긴 한데 김호동 교수님의 <황하에서 천산까지>와 처럼 애정과 소양이 만렙인 이방인의 속깊은 마음이 담겨 있어서 문학적 정취도 짙네요.


원제는 <Low City, High City>인데 전 도쿄를 여러 번 가보긴 했지만 일본어 까막눈이라 야마노테가 귀족들과 상급 무사들이 살던 언덕지대이고, 시타마치가 소상인과 직인(죠닌)들이 살던 저지대인지도 몰랐습니다. 게다가 매번 하네다로만 입국하면서 스미다 강 동쪽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요.


<효게모노>에 히데요시의 견제책으로 인해 미카와에서 간토로 전봉을 당한 이에야스가 직접 괭이질을 하면서 간척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스미다가와 하구의 땅이 시타마치였다니. 높으신 분들은 간척지의 짠물과 생선비린내가 싫어서 야마노테쪽에 살았겠죠?


작년 도쿄여행 때 찍었던 철교의 이름이 '일본교(니혼바시)'라 신기했었는데 저 다리가 최후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준공식 행령의 선두에 섰고 명호를 휘호한 그 돌다리의 후예가 맞는지 궁금합니다.


에도와 도쿄의 도시사에 대해 무지하다보니 니혼바시, 교바시, 긴자, 아카사카, 진보초, 마루노우치, 히비야, 아사쿠사, 아자부, 시부야, 신주쿠 등의 지역이 예전에 어떤 곳이었는지 전혀 몰랐는데 이 책을 통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제가 안 가본 곳에 대한 서술은 아무래도 덜 와닿았지만요.


에도가 개항 이후로 서쪽과 남서쪽으로 계속 팽창해왔다는 기본적인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도쿄만의 수심이 워낙 얕아서 요코하마를 통해 연결될 필요가 있었고, 궁벽한 도호쿠와 달리 서쪽으로는 농업생산력이 높고 상업이 발전한 도시들이 많았으니 당연한 귀결이겠죠. 그래도 한 때 인구 백만의 세계 최대 도시였던 에도시대 인구의 절반 이상이 비좁아 보이는 시타마치에 살았다니 잠깐이라도 타임워프해서 당시 시타마치의 혼잡한 거리를 구경하고 싶어집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시대의 도쿄 변천사 중에서 서구와의 불평등조약 개정과 치외법권 철페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세운 로쿠메이칸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쇼와시대 이후 도쿄의 마천루와 휘황찬란한 건축물들보다 에도시대 시타마치의 흔적들에서 일본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저자는 '새롭고 커다란 것은 조잡하고 거친 경우가 너무 많다'며 사라져 버린 옛 모습을 그리워 하고 있네요. 이미 아름다운 옛 것이 사라져버려서 심미안이 필요없어져버린 세태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옛이야기라고 생각하시며 보면 좋습니다.


신주쿠(新宿)라는 지명이 '새로 생긴 역참'에서 왔다거나, 오밀조밀하게 붙어있는 시타마치의 교바시와 니혼바시, 긴자의 변화 양상, 화장품 회사로 유명한 시세이도가 해군의 약사가 긴자에 창업한 약국에서 시작됐고, 긴자의 후게쓰도(風月堂) 본점이 청일 전쟁 중 군용 건빵을 60톤 넘게 납품했고, 러일 전쟁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후원을 받았던 과자점이라니. 대사관과 고급저택 등 핫플레이스인 아자부 지역이 메이지 말경에도 도쿄의 깡촌이었다고는 상상이 안되네요.


일본의 3대 신문사 마이니치, 아사히, 요미우리 중 앞의 두 개가 오사카 회사이고, 요미우리만이 처음부터 도쿄에서 시작한 신문이라네요. 왜 '요미우리 자이언츠'인지 알았습니다. 지금의 도쿄대학 부지가 파란만장한 전국시대에서 여러 주군을 모시며 가장 성공적인 다이묘의 인생을 살았던 마에다 가문의 저택이 있었던 땅이라니. ㅎㅎ


마지막 사진은 작년에 도쿄여행 갔을 때 봤던 건물 중에서 에도 시대의 느낌이 가장 많이 났던 주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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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쪽


1867년 쇼콘샤(1879년 야스쿠니 신사로 개칭)가 세워진 진정한 목적은 보신전쟁(戊辰戦争:메이지 원년에 벌어진, 관군과 옜 막부군 사이의 싸움을 총칭함- 옮긴이)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로 청일,러일 전쟁을 비롯하여 새로운 전투가 벌어지고 새로운 전사자가 나옴에 따라서, 추모하는 사람들의 범위도 넓어졌다.


174쪽


도쿠가와 시대의 3도(에도, 교토, 오사카)의 특징을 말하는 속담 종류가 여러 가지 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제법 날카롭게 정곡을 찌른 것도 있다. 그 중에서도 뛰어난 것이 바로 "교토는 입어서 망하고, 오사카는 먹어서 망한다."는 속담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에도는 필경 '보다가 망한다'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에도 토박이는 무엇이건 구경하기를 몹시 좋아했다. 축제나 잿날, 연극을 비롯해서 갖가지 공연이나 흥행물을 좋아했다. 흥행물은 이른바 에도 문화의 중심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부키는 그 최고봉에 위치하며 에도 풍류꾼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리고 가부키와 거의 대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 유곽이었다. 이 두 가지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우월한지는 거의 판가름하기 어렵다.


201쪽


'화류계'라는 표현은 원래 당나라의 시인 이백의 시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유흥가의 여성을 꽃과 버드나무에 비유한 것이지만, 꽤 까다로운 사람은 이 두 가지를 구분한다. 지금은 거의 잊혀져 가고 있지만, 원래 꽃은 유녀, 버드나무는 게이샤를 지칭했다고 한다.


288쪽


아자부는 인구가 가장 적은 구는 아니었지만, 메이지 말경에는 아직 15개구 중에서 가장 시골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인력거꾼도 아자부에는 가려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자부의 길은 그야말로 멋대로 나 있었으며, 더구나 서로 제대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은 탓으로 인력거꾼이 길을 헤메게 되어, 프로로서 체면을 손상당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309쪽


아사쿠사에서는 에도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연이나 흥행에 군중이 물려들었다. 에도 말기 아사쿠사는 거의 연극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최대의 유곽을 끼고 있었기에 환락가로써 번창했지만, 두 세계대전 사이의 이 시기에 아사쿠사는 그야말로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에도 이래의 전통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다른 아주 모던한 환락가가 된 것이다.


아사쿠사는 새로운 대중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후각을 갖고 있었다. 시대와 보조를 맞추는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앞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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