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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훈] 조선을 탐한 사무라이(2016)

독서일기/일본

by 태즈매니언 2018. 1. 19.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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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역사가가 쓴 조슈와 사쓰마의 메이지 유신지사들과 동시대 조선의 동정에 대한 답사기입니다. 저자가 신문사 기자와 기업 경영을 해보는 등 다양한 경험이 있다보니 기본적으로는 메이지 유신 당시를 바라보던 시야가 넓은 편입니다. 메이지 유신의 주요한 사건들을 잘 짚어서 요약하기도 했고요. 게다가 메이지 사적지를 아홉 차례나 답사하면서 찍은 생생한 컬러사진도 꽤 도움이 됩니다. 2010년에 나왔다는 초판을 다듬은 두 번째 개정판이라 공이 꽤 들어간 것 같고, 저자가 글을 생생하게 쓰는 솜씨가 있으시더군요.

표지 사진이 다카스기 신사쿠인 것도 탁월한 선택입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까지 많은 유신 지사들의 희생이 있었고, 대내외적인 행운이 따르긴 했지만 성공으로 가는 절체절명의 분기점은 저자가 판단한 것처럼 26세의 다카스키 신사쿠가 겨우 80명의 병력으로 공산사에서 거사를 일으켰던 때가 맞다고 봅니다.

단 주의할 점도 있는 책입니다. 참고문헌에 이덕일씨의 책이 네 권이나 들어가 있는 것만 봐도... 기본적으로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개설한 최고경영자과정 수료자들이 결성한 '동아시아 근대사' 스터디 모임에서 시작한 지라 이태진 교수가 가진 인식의 한계에서 완전히는 벗어나지 못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덕일씨의 영향인듯한 일부 표현들도 좋은 책의 가치를 좀 떨어뜨리고요.

그래도 메이지 유신지사들에 대한 생동감있는 대중 입문서로 괜찮은 책입니다. 박훈 교수님의 책은 좀 학구적인 면이 있으니까요. 이 책을 읽었으니 올해 일본에 대한 계통있는 독서의 최종보스인 성희엽 교수님의 <조용한 혁명>으로 마무리를 해야죠.

신상목 사장님의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를 먼저 보시면 개항기 이전 도쿠가와 막부시절의 일본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고, 당시의 조선과 비교할 수 있어 독해에 큰 도움을 받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전 작년에 <이토 히로부미 평전>을 읽다가 지루해서 던져버렸는데, 나중에 다시 시도해보고 싶네요.

읽으면서 일본과 조선이 극명하게 대미되는 부분이 정말 많았습니다. 1801년부터 4년 동안 오키나와와 필리핀 루손섬, 마카오, 난징을 거쳐온 총명한 홍어장수 문순득이 흑산도에서 늙어죽도록 내버려둔 조선과 표류하다가 미국 포경선의 구조를 받아 미국에서 12년 살다가 귀국한 도사 어부 나카하마 만지로에 대한 막부의 특채(둘 다 <표류시말>과 <표손기략>이란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등 같은 해에 태어난 고종과 메이지 천황 시대의 역사적 사건 연표를 대비해보면 참...할 말이 없습니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안 일으켰다면 조선은 러시아의 위성국이 되었을 테고, 어쩌면 몽골보다 빨리 세계에서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북한의 위협때문에 유신과 중화학공업을 통해 근대화에 매진한 박정희도 없었을테고, 수흐바타르같은 적당한 민족주의자가 통치를 했겠죠. 그러다가 스탈린 동지의 철권 영도를 받으며 살면서 태백산 산간엔 요코즈카와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향하는 잘 엄폐된 미사일 기지가, 거제도에는 러시아 해군기지가 설치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래도 1905년의 을사조약이 민족적 수치이고 백 년 후에도 일본을 절대로 용서 못할 이유일까요? 8.18 정변으로 교토에서 무수한 죠슈 사무라이들이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인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의 가쓰라 고고로도 샷초동맹을 결성해서 막부를 무너뜨렸는데 말이죠. 이제는 컴플렉스를 던져버리고 넓은 시야를 가지고 일본을 보다 유연한 태도로 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작년에 도쿄의 황궁 앞 공원에서 봤던 위엄있는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 의 청동기마상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막말의 웅번 중 사쓰마와 조슈의 재력과 시대동향을 선도한 기질이 어디서 나왔는지, 페리제독이 흑선을 타고 와서 에도만에서 무력시위를 한지 겨우 4년만에 증기선 군함을 도입한 막부의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의 과단성(황궁정원과 통하는 문인 사쿠라다몬에서 죽었다니. 이봉창의 히로히토에 대한 폭탄 투척도 이 곳에서..역시 여행도 공부를 좀 하고 가야하는데), 신미양요 때 미국함대의 사령관 존 로저스 제독이 윌리엄 페리제독의 외손자였던 사실, 세토 내해를 통한 대내 밀무역에 이해관계가 있었던 조슈번과 국제 밀무역으로 치부했던 사쓰마번의 이해관계 차이, 걸물이었던 모리 가문의 창시조 모리 모토나리와 모리 가문 문장의 유래(다이묘 문장 중 젤 짱인듯), 1993년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선언이 나오는데 교세라 출신의 삼성전자 고문 후쿠다 다미오의 보고서와 이를 알아본 이건희 회장의 혜안이 있었다는 일화, 러일전쟁 때 일본의 전쟁국채를 사주고 매각주간사 역할도 했던 유태계 쿤롭사의 제이콥 쉬프와 쿤롭사의 후신인 리만 브라더스의 아태 유럽부문을 노무라증권이 인수한 백년의 인연, 러일전쟁 후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에 대한 일본 내 반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대체 보상으로 을사조약이 서둘러 체결된 측면, 마크 트웨인이 러일전쟁의 종군기자로 1904년 조선의 압록강변을 방문한 사실 등등 재미난 역사지식들도 많이 얻었습니다.

이 책 덕분에 보고싶은 영화와 드라마, 다음 일본 여행 때 기회가 되면 가보고 싶은 곳이 엄청 늘었네요. 하기 시의 송하촌숙, 삿쵸동맹을 모의한 야마구치의 진류테이 등등 죠슈번 유신지사들의 사적지부터요.(임아이돌님이 세번째 일본여행 목적지를 왜 야마구치로 잡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ㅎㅎ) 나카사키의 글로버 가든, 보방식 요새 느낌이 나는 하코다테의 오릉곽성도 기회가 되면 보고 싶고요.

기억해 두고 싶은 지식들이 많아 갈무리할 목적으로 여러 구절을 인용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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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쪽

일본 재벌의 원조격인 미쓰비시 그룹은 바로 이 해원대에서 사카모토 료마의 오른팔로 활동했던 이와사키 야타로가 사카모토 료마가 남긴 유산을 밑천으로 창업한 기업이다.

79쪽

증기선의 주 연료는 석탄인데, 한 번 항해에 실을 수 있는 물량은 일주일 치에 불과했다. 따라서 대양 항로를 개척하려면 석탄의 중간 보급 기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대서양과 인도양 항로는 유럽 제국의 식민지 개척으로 중간 보급 기지가 개발되어 있었지만,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바로 중국으로 항해하려면 유일한 중간 기착지인 일본에서 연료 보급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서유럽 제국에 거의 무장해제를 당하다시피 하여 대 중국 무역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 있었다. 신생 무역국인 미국은, 영국, 프랑스에 이어 1844년에 중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태평양을 통한 중국 항로의 개설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유일한 중간 보급지였던 일본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중략)
우여곡적 끝에 벌어진 교섭에서 두 나라는 에도 만의 입구인 시모다와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두 곳의 개항에 합의했다. 미국이 북쪽의 하코다테를 먼저 개항지로 선택한 이유는 북태평양 조업에 나선 포경선단의 중간 기착지로 지리적 접근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시모다는 태평양을 횡단하여 중국으로 항해하는 선박의 중간기착지로 선정됐다.

149쪽

당시 조슈번에서는 '무육금'이라는 특별회계를 따로 운영했는데, 일반회계와 분리하여 특별한 용도나 번의 장래 재원으로 따로 비축해 두는 자금으로 번주도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는 돈이었다. 막부 말기에는 이 자금이 수백만 냥에 이르렀다.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조슈 번이 유신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비축해 놓은 풍부한 자금줄 때문이었다.

162쪽

본래 권력이 없었던 메이지 천황이 신하들의 개혁조치를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가진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던 고종은 자신이 근대화의 주체가 되어 국왕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291쪽

페리 제독이 내항했을 당시 사쓰마 번 번주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페리가 국서 전달과 함께 막부에 선물한 라이플총 두 자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막부 각료에게 부탁하여 한 자루를 빌려다가 밤을 새워 분해하여 도면을 만들게 했다. 사쓰마로 돌아온 그는 에도에서 가져온 도면을 신식 문물 제조 공장으로 설립한 '집성관'에 주고 이 소총을 3천 자루나 만들라고 명령했다.

387쪽

1907년 제3차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내정권을 완전히 장학한 일제는 아전들의 징세권을 박탈하고 과세대장을 새로 작성하여 직접 징수에 나섰다. 은결의 병폐가 근절되면서 세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1905년 216만 원이던 지세 수입이 1910년에는 3배에 가까운 600만 원으로 급증하였다. 국고의 절반이 탐관오리들의 뒷주머니를 채우는데 들어갔다는 사실이 통계로 입증된다.

396쪽

일본은 데지마로 탈출한 하멜을 심문하여 조선이 이 사건을 계기로 네덜란드와 교역할 의사가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캐물었고, 초량왜관을 통해서 조선 조정의 의지를 탐문했다. 조선이 전혀 그럴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일본은 조선 조정과 교섭하여 남아 있던 하멜 일행까지 돌려받아 네덜란드로 돌려보냈다. 조선이 일본을 제치고 대외교육에 나설 것을 우려하여 씨를 잘라 버린 것이다.

<하멜 표류기>가 계기가 되어 조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네덜란드는 조선과의 교역을 추진하기 위해 1천 톤급 무역선 '코레아 호'를 건조하기까지 했지만, 서구와의 대외 무역을 독점하려는 일본 막부의 방해로 코레아 호는 결국 조선으로 항해하지 못했다. 일본은 코레아 호가 조선으로 갈 경우 데지마를 폐쇄하겠다고 네덜란드를 협박해서 코레아 호의 출항을 막았다.

402쪽

<해국도지>를 지은 웨이위안은 아편 무역에 대한 강경 조치로 전쟁을 촉발한 임칙서의 절친한 친구였다. 1841년 6월, 아편전쟁에 대한 패배로 파면되어 귀양을 가던 임칙서는 자신이 몇 년 동안 수집한 서양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웨이위안에게 넘겨주며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책을 펴내 줄 것을 눈물로 당부했다. 임칙서와 웨이위안은 아편전쟁 후 중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은 서양세려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대비를 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방과 군사기술에 관한 부분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416쪽

무력으로 일본을 개국(1854), 개항(1858)시킨 미국이 곧 이어 터진 남북전쟁(1861~1865)으로 기껏 열어 놓은 일본 시장에 들어올 여력이 없었다. 미국이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켰을 무렵에 영국, 러시아, 프랑스는 크림전쟁(1853~1856)으로 유럽에 발이 묶여 있었다. 크림전쟁이 끝난 후에는 중국에서 1856년 애로우호 사건을 시발로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나 1860년까지 서양 제국이 중국 경략에 몰두해 있었다. 메이지유신이 막바지에 이른 1860년대 말에는 막부의 강력한 우호 세력이었던 프랑스가 보불전쟁(1870~1871)로 일본에서 손을 뗐다.

일본의 내정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이 결정적인 시기에 국운을 건 전쟁으로 일본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개항 초기 일본의 대항력이 가장 약했을 때, 일본으로 밀고 들어오던 외부 충격의 힘이 동시에 빠지면서 내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 기간에 일본은 치열하게 갈등하고 부딪치면서 내부 체제 정비에 전력투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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