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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스미스/노시내 역] 다른 누군가의 세기(2010)

독서일기/동아시아

by 태즈매니언 2018. 9. 12.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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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55년 전후체제의 성립과정을 통해서 일본의 지연된 근대성과 개인들이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을 잘 묘사했던 <일본의 재구성(2008)>의 저자 패트릭 스미스의 2010년 에세이다. 애번 오스노스가 <야망의 시대>에서 중국의 모습을 관찰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지만 다루는 스케일이 크다보니 훨씬 흐릿해서 꾸역꾸역 겨우 읽어냈다.

30년 이상 아시아 구석구석을 누비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온 저자는 일본, 중국, 인도에서 보고 만났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금파리 모으듯 보여주며, 아시아 국가들이 국민국가와 근대적 자아관념 등의 서구적 관념을 따라잡기 식으로 매진해온 시대는 이제 끝났고, 이제 대안적인 모델을 제시하기 시작한 아시아를 응원하며, 이제 서구가 아시아를 관찰하고 배울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지 8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볼 때 패트릭 스미스의 기대는 너무 시기가 일렀던 것 같다. 한족중심 국가주의를 내세우는 무뢰한들이 드물게 당이 허락한 자유를 만끽하는 중국이나 인도의 힌두민족주의와 무슬림간의 유혈사태, 여전히 과거사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헌법도 제정하지 못한 일본, 최근 일본대사관 앞이나 번화가에 위안부 소녀상을 세우는 한국과 대만 모두 아직 18세기 서구에서 받아들인 국민국가 형성(nation building) 중에 있다고 보인다. 

대만까지 가서 위안부 소녀상에 항의하고 발길질하는 일본의 우익들을 그저 탑골공원에서 태극기 흔들며 누구에게인지 모를 울분섞인 욕설을 퍼붓는 노인처럼 무심하게 지나치고, 그런 인터넷 기사 클릭도 안하는 때는 언제쯤 올까? 그나마 상황이 나은 우리나라도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대해 강제된 망각과 집단적 기억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지 않나.

이런 상황에서 각 국가의 개인들이 국민의 시야를 넘어서서 아시아와 서구가 서로를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고 서로 배우는 관계는 아직 요원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학문의 영역에서 영미식 합리주의를 뛰어넘을 아시아적 가치가 생겨날 수 있을까?

난 아베 집권 이후 일본의 경제가 살아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일본이 탈서구 시대의 대안적 모델을 보여줄 수 있는지 회의적이다. '목적이 없는 국가'라는 개념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당연히 생존 자체가 목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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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쪽

"망각과 역사적 누락은 국민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연구는 위험할 수 있다." 르낭의 <국민이란 무엇인가?>에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문구는 다음의 짤막한 문장이다. "따라서 국민의 본질은, 구성원 전원이 많은 공통점을 지닐뿐 아니라 특정한 사실을 망각한다는 데 있다."

185쪽

"망각에는 양면성이 있어요. 1980년대 생은 문화대혁명 같은 사건을 거의 몰라요. 그게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전혀 판단하지 못한다는 얘기죠. (중략) 망각이라는 정책이 지도층이 원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요. 왜 망각해야 하는지 그 이유까지도 함께 망각해버리는 거지요. 그러고 나면 다시 기억하기 시작하는 거예요."(시에용, 샤먼의 역사학자)

285쪽

이제 미국이 또 다른 조지 부시를 대통령으로 뽑을 확률은 또 다른 페리 제독을 탄생시킬 확률만큼이나 낮은 듯 하다. (그리고 트황상님께서 오셨죠. 이런 관점을 갖고 쓰셨으니 제가 동의를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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