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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헌목] 가치있는 아파트 만들기(2017)

독서일기/도시토목건축

by 태즈매니언 2018. 11. 25.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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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단지라는 주거형태에 대한 사회학적인 분석을 시도한 책들은 좀 봤지만 인류학자가 참여관찰한 연구 성과물은 처음이다. 저자 정헌목 박사의 성실성은 참고문헌 목록이나, 제2장에서 1963년 준공된 국내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의 아파트 생활사를 50페이지 분량으로 요약한 부분만 봐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한정된 분량으로 이렇게 잘 정리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추천해주신 양효빈 (Hyobin Yang)님 감사합니다!)

 

저자가 박사학위 논문에서 5천세대 가량의 브랜드 아파트 단지(gated community)내에서 입주민들간의 공간적 상호작용을 참여관찰한 내용이 중심이다. 신축이 아니라 시영아파트의 지역 재건축조합 방식에 의해 입주한 아파트라는 점도 특징이고.

 

이 책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폭발적인 내용은 '제5장' <공동체가 드러나는 뜻밖의 순간 : 단지 내 어린이 사망사고를 둘러싸고>였다. 경기도 어느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 내에서 발생한 교통사고가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와 세부적인 부분은 물론 사후 이후의 전개과정까지 판박이처럼 똑같아서 놀라웠다.

 

무/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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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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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같/
다/

 

1997년 폐기물관리법 시행규칙 개정 후 지자체가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민간 수거업체에 위탁하기 시작한다. 낮은 계약단가와 인원 부족으로 3인 1조 근무수칙은 지켜지지 않고, 운전자가 나홀로 근무하며 수거와 운전을 도맡는다. 게다가 음식물 쓰레기 차량은 원래 심야시간대에만 아파트 단지를 출입하여 수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아파트 단지 저층부 주민들이 새벽시간 대 수거차량 소음에 대해 민원을 제기한다. 등쌀에 시달린 관리사무소는 입찰 등 금전이 오가는 계약 건 외에 무관심한 입주자대표회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시청에 수거시간 조정을 요청한다. 시청은 관리사무소 요구에 따라 수거 시간 제한을 없앴다.

 

그리고 지상에 차가 없어 안전한 아파트라고 자랑하던 이 단지에서 아침 등교길에 유치원생 여아가 갑자기 후진한 청소차량에 깔려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눈 앞에서 딸의 처참한 시신을 목격한 어머니는 혼절하고. 혼자서 수거업무를 수행하던 환경미화업체 담당자는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처벌을 받고. 이 아파트 단지에 사는 엄마들 수백명이 나서서 관리사무소, 입주자대표회, 나아가 시청 청소과장과 시장을 성토한다. 결국 시장이 조문오고, 아파트단지 내에 차려진 분향소에서 공식사과까지 한다.

 

전부 읽어보면 전율이 일 정도로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 사망 교통사고의 발생원인과 처리 절차를 보면 세월호 사고와 닮아있다. 지금 이 아파트 내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는 차량은 3인 1조 근무수칙을 지키고 있을까? 그리고, 단지 내 사망사고에 대해서 시청 청소과장을 조리돌림한 것이 과연 현명한 방법이었을까? 우리는 여전히 아파트 시세에 전전긍긍하며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를 목표로 하거나 무관심하면서 말이다.

 

사망사고 발생 당시 입주자대표회 회장의 심정을 헤아리다보니 그리고 세월호 좌초사고 발생 시점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신속하고 현명하게 대응했거나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고 거짓을 일삼지 않아서 도드러지는 표적이 되지 않았다면...만약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 임기 때 이 사고가 발생했더라면...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민감한 부분을 거칠게 휘젓는 표현인 거 나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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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쪽

 

단지 내 '지상의 공원화'가 입주민들의 일상적 경험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한편으로 이는 한국의 도시민들이 일상에서 녹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제한적이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기회를 얻는 방법이 고급 아파트 단지라는 주택상품을 사적으로 구매하는 것 외에 달리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열악한 상태로 남아 있는 도시 공공공간의 현실을 반영한다.

 

324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거지는 각자 소유한 경제적 자본에 따라 정해지며, 높은 가격의 주거지일수록 안전한 공간환경을 갖추기 마련이다. 하지만 위험이라는 존재 자체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주민들은 마음 놓고 아이를 키우려고 외부의 위험을 피해 아파트 단지로 왔지만, 적절한 수준의 사회적 참여로 형성된 공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물리적 공간이 주는 이점은 온전히 발휘되기 어렵다.

 

326쪽

 

르네 지라르(Rene Girad)에 따르면, 위기에 처한 사회집단은 자신들의 분노를 집중시키기에 좋고 당장의 조치가 가능한 대상을 찾아 사태의 책임을 묻는 경향을 보인다. 또 그러한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는 사건의 실제 원인이 다양하다는 사실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스스로를 책망하기보다 집단 외부의 타인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이기 쉽다. 결국 이렇게 소수 집단 혹은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집단 전체의 기존 질서가 다시 주조되는 결과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351쪽

 

적어도 차량으로 인한 위험만큼은 안전할 것으로 믿었던 단지의 지상공간에서 집단 내 가장 약한 존재인 어린아이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건은 아파트 단지라는 집합체 자체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브랜드 아파트 단지라는 '안전한 곳에 살고 있다'는 믿음이 깨지자, 곧바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안전한 곳에 살고 싶다'는 근원적인 욕구였다. 그리고 그제야 주민들, 특히 젊은 입주민들이 자각할 수 있었던 건 아파트 단지라는 집단이 타자와 함께하는 관계의 공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욕구와 자각이 결합하면서 젊은 입주민들은 전에 없던 집단적 실천에 나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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