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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진] 누운 배(2016)

독서일기/국내소설

by 태즈매니언 2019. 6. 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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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 휴일은 책 읽기 좋은 날인데, 이렇게 훌륭한 한국소설과 반나절을 보내니 흐뭇하다. 겨우 몇 년 전인 2016년에 나왔고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데 한승혜님의 권유로 읽기까지 작가나 소설의 이름을 들어본 기억도 없었다.

 

내 독서습관이 비소설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재작년에는 8대2, 작년엔 9대1로 소설의 비중이 낮아지더니 올해는 얼마 전 읽었던 이기호씨의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가 올해 읽은 첫 소설일 정도다. 그나마 몇 안되는 소설들도 대부분 외국 유명 작가의 작품이고.

 

왜 한국소설을 안읽냐고? 문학상 받았다는 작품들을 찾아봐도 사랑이나 가족사라는 사골 소재가 일주일 넘게 들통으로 고아 우린 곰국물 맛이고, 나오는 조직들도 학교나 대학, 언론이나 출판계쪽들이 많아 물릴대로 물린 지가 한참이다.

 

외주제작사의 드라마작가가 쓴 회사생활 드라마의 설정이 어이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라고 하지만 그나마 팀 단위로 일하는 방송쪽은 소설보다는 낫다. 아무리 각색과 위트의 재능이 있어도 조직생활의 경험이 없는 이들이 회사나 행정관청 내부의 생리를 어찌 알겠는가?

 

조선업이 활황이던 2000년대 중반에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중소조선소에서 일하는 실무자가 화자인 이 소설은 제조업종 중에 규모 대비 자동화율이 가장 낮아 인력의 중요성이 큰 조선업의 특성을 잘 살려서 회사 조직 내에서 사람들이 일을 해내기 위해 협업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리와 힘'(누운 배를 읽으신 분들만 알 수 있는 ㅎㅎ)' 사이의 충돌과, 개인들이 그 충돌과정에서 이익을 얻거나 불운을 피해가기 위해 하는 행동들을 잘 묘사하고 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강렬한 인물인 황사장에 대한 관찰들을 보니 1998년 한국전기초자에 부임했던 서두칠 사장이 떠올랐고.

 

책을 덮을 때 쯤이면 '누운 배'라는 흥미로운 소재가 (한국)사회에서 노동력을 팔아 조직 내에서 분업하며 받는 대가로 살아가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 다른 상징이 되리라 믿는다.

 

잘 짜여진 큰 회사에 다니는 분들보다 전 직원이 수백 명 단위인 회사나 조직에서 일하는 분들이 더 재미있게 읽으실 듯. 누가 공무원 조직(특히 구청 정도의 애매한 단위)이나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이런 소설 써주면 좋겠네.

 

나처럼 내수로 먹고사는 사람들도 풍족한 생활수준을 누리게 해준 공로자인 조선업 종사자들이 어떤 일들을 하시는지 조금은 알게 된 것도 이혁진 작가님 덕분이다.

 

무려 3년 동안 쓰신 끝에 이 소설을 완성했고, 지금도 글 쓰는 일로 생계를 꾸리고 계시는 이혁진 작가님을 위해, ‘맡은 일을 충실히 하려 노력하고 그 와중에 다른 사람들도 배려해주는데 소설은 거의 안보는’ 내 직장 동료들에게 선물하고자 세 권을 주문했다.

 

훌륭하거나 저렴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이익을 얻고 더 성장해야 하는 것처럼 선배의 집에 더부살이하면서도 끝내 이 소설을 만들어낸 작가와 훌륭하지만 묻혀버린 책들을 발굴해주는 프로독서가가 마땅한 대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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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쪽

 

회장은 모든 일을 지시하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모든 일에서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82쪽

 

많은 사람이 굴욕과 손실을 지적하고 반발하는 대신 아량과 인정, 애사심이라는 것을 발휘했다.

 

97쪽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자잘한 기본 업무에 치여 정작 기본 업무를 정의하고 정리하는, 불필요한 일을 빼고 더 필요한 일을 집어넣는 작업은 하지 못했다. 어제 한 일을 오늘도 했고 내일도 모레도 해야 했으며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은 줄지도 더 쉬워지지도 않았다. 그것이 빤히 보이자 사람들은 더 나갔다.

 

161쪽

 

(황사장의) 포화 속에서 무능한 임원들의 해명은 변명이 됐고 변명은 핑계가 됐으며 핑계는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무관심과 무책임은 이해력과 관찰력 부족, 관리 태만, 책임 회피, 분별력과 판단력 결여로 낱낱이 까발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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