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도널드 쿼터트/이은정] 오스만제국사(2000)

독서일기/중동아랍

by 태즈매니언 2020. 1. 27. 16:04

본문

우여곡절끝에 터키여행이 겨우 결정되었다. 여행 일정상 이스탄불과 오스만 제국의 발상지인 부르사만 보고올 듯. 간략하게라도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면 좋을 것 같아 보게 되었다. 원서가 2000년에 나와서 좀 오래되긴 했다.

 

바이칼 호 부근에서 기원한 튀르크(돌궐)족들은 6세기 스텝지대를 제패해서 제국을 세웠다. 이 때 당나라에 대항해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기록도 남아 있다. 당에 의해 멸명한 돌궐제국의 잔여세력들이 서쪽에 세운 셀주크 투르크가 몽골제국에게 멸망하고 난 후, 몽골인들을 피해 서부 아나톨리아로 쫓겨온 일파인 오스만 족장과 그 후예들이 차근차근 세를 불려 500년 이상 존립한 제국이 오스만제국이다.

 

표지의 부제가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인 것처럼 저자 도널드 쿼터트는 1300~1683년까지 서부 아나톨리아의 작은 공국이 어떻게 대제국으로 발전했는지에 대해서는 한 장의 간략하게만 다룬다.

 

오스만 제국의 쇠퇴기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와 아랍 및 투르크 민족주의 입장에서의 전통적인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저자덕분에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18세기 이후 수세에 몰린 오스만 제국이 탄지마트와 같은 최신 기술과 제도의 도입을 통한 대응에 실패하고, 메카까지 침탈 당하여 무슬림세계에 대한 대표성이 훼손되자, 영국과 손잡은 사우드 가문이 주도권을 쥔 와하비즘의 방향인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복고주의가 아랍에서 호소력을 얻었던 상황이 중동 문제의 시작이 아닌지.

 

더 근본적으로는 1911년 독일의 해군력 증강계획의 여파로 대영제국 해군장관 처칠이 군함의 전력강화를 위해 석유를 군함의 연료로 채택하면서 석유 공급지로 앵글로-페르시아(BP의 전신)가 위치한 페르시아만에 대해 이해관계를 갖게 된 것이지만.

 

포르투갈인들이 인도 항로를 발견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중계무역 이익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은 종교와 민족의 차이에 대해 관용적이고 지방분권적인 정책, 유럽 열강들의 세력균형정책을 잘 활용하는 외교력으로 무슬림 신민들의 지지를 유지하며 생각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한 번도 제국이 되어본 경험이 없는 나라에서 살다보니 제국을 이해하는게 쉽지 않더라. 내 경우엔 함경도 화령에서 발원하여 한반도가 제국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대체역사소설 <더 퍼거토리(김경록)>를 재독했던 게 오스만제국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오스만제국이 <더 퍼거토리> 1부에서 고려계 심양왕의 차남인 주인공 왕현이 만든 제국 대진국의 서아시아 버전처럼 보이더라.

 

--------------------------------------

 

65쪽

 

데브르시르메 제도(어린이 공납제도)는 남성들에게 최고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농촌 소년들이 오스만 왕실을 제외한 가장 높은 군사적 행정적 지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이 제도는 수많은 기독교인 신민의 인력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제국에 공헌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86쪽

 

예니체리들이 점점 더 도시 경제의 일부가 되어감에 따라 그들의 엘리트 지위를 물려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결혼과 영외 거주에 대한 금지는 사라졌고, 차츰 도시에 거주하는 예니체리의 아들들이 데브르시르메로 충원되었던 농촌 소년들을 대신하게 되었다.(마지막 데브르시르메 소년 공납은 1703년에 있었다) 18세기 초, 화기로 무장한 이 보병부대는 세습적이고 도시 출신으로 이룽졌으며, 그 신분은 출생시 기독교인이 아니라 무슬림으로 태어난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졌다.

 

190쪽

 

18세기 말부터 무슬림 난민들이 오스만 세계를 거대한 규모로 뒤덮기 시작했다. 1783년부터 1913년까지 약 500~700만 명의 난민들 - 그 가운데 적어도 380만 명은 러시아 신민들이었다. -이 축소되고 있는 오스만 국가로 쏟아져 들어왔다.

 

202쪽

 

19세기 동안 국제 무역이 세계적으로 64배 증가했지만 오스만 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10배에서 16배 증가에 그쳤다.

 

291쪽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오스만 치하에 남았던 영토들에서 아랍, 튀르크, 쿠르드 민족주의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도 근본적인 요점을 거듭 강조해야 할 것이다. 어떤 종족에 속하든 오스만 무슬림들은 오스만 통치 아래 근본적으로 만족했으며, 적극적으로 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303쪽

 

서유럽인들은 터키를 오스만 국가의 여러(30여 개) 계승국가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단 하나의 계승국가인 것처럼 다루는 오류를 범한다. 이러한 입장은, 오스만 제국이 부분적으로는 아나톨리아에서 기원하여 튀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로 이주했고, 결국 아나톨리아가 제국 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 되어, 그 안에서 튀르크 종족이 가장 큰 단일 집단이었다는 사실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