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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맥닐/허정 역]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1977)

독서일기/의학

by 태즈매니언 2020. 3. 1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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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세계사>로 유명한 역사가 윌리엄 맥닐의 책인데 한참 전에 중고로 샀던 걸 코로나19 시국을 맞아 읽게 되었다. 무려 1977년에 출판된 책인데 기본적인 주장은 1997년에 나온 제레드 다이아몬드 선생님의 <총, 균, 쇠>와 꽤 비슷하다. 크로스비의 <생태제국주의(1986)>와도 많이 겹치고.

 

의학이나 역학의 전문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 역사가의 시각에서 이런저런 역사적 사실들을 꿰어맞춰서 저자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한 가설들이 많이 나오는데, 가설임을 전제하고 서술하는 거라면 문제 없다고 본다. 거의 반 세기 전에 나왔으니 제기된 가설들 중 상당수는 학계에서 논박이 되었을 듯 싶다.

 

다양한 생태환경에 거주하는 다민족 국가 내부 토착민 집단간의 경험적인 방역 관습(터부 혹은 최근의 '사회적 거리두기')이 계급을 형성한 사례로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아닐가 하는 저자의 가설과 기원전 2세기 경 황허 문명이 안정된 이후, 기후와 지형이 농경에 유리했던 양쯔강 이남의 평야지대에서의 인구가 증가하기까지 400년이 걸린 이유를 열대성 풍토병에의 적응기간으로 본 것이 특히 흥미로웠다.

 

거대한 초나라가 의외로 인구 및 농업생산력이 떨어져서 진나라에게 패한 원인 중 풍토병의 기여분, 적벽대전 직전 조조의 80만 대군 진중에서 돌았던 전염병이 열대성 수인성 전염병인 '주혈흡충병'이 아니었는지에 대해 중국 학자들이 밝혀주면 좋을 듯.

 

증기선을 통한 고속의 대륙간 이동이 가능해진 시기에 찾아온 페스트의 대유행(1984~1921)이 근대적인 역학의 발전을 가져온 것처럼 제발 종교나 토착관습처럼 전염병을 예방할 수도 있고, 확산시킬 수도 있는 교조적 경험주의에서 벗어나 역학 전문가의 지시대로 따르자.

 

엊그제 어떤 글에서 최초로 40일의 검역기간을 설정한 곳이 베네치아라고 읽은 것 같은데 이 책에서는 현재의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인 라구사항이 1465년에 최초로 제도화하였고, 이어서 1485년에 베네치아에서 도입했다고 한다.

 

<총, 균, 쇠>를 읽었다면 굳이 지금 읽을 필요는 없는 아웃데이트된 책이긴 한데, 흥미로운 가설들이 많아서 생각보다는 재미있게 읽었다. 덕업일치의 모범적인 사례인 저자가 인용하는 다양한 논문성과들이 신기한게 많다.

 

책의 주요 내용과는 별 상관없는데 301페이지 인용 부분은 도시문명의 전성기인 현시대를 사는 전세계의 시골출신 20대 청년들의 폭넓은 불만과 잘 통찰하고 있어 놀랍다. 참고로 1977년은 통계청 기준(읍면이 아닌 동거주자)으로 한국의 도시화율이 50%를 돌파한 시기이다. UN기준으로 전세계의 도시화율이 50%를 넘은 시기는 2008년이고.

 

면역기간이 짧고 자주 화학구조를 바꾸는 RNA바이러스 사도들이 현재의 인류가 직면한 범세계적인 도시/농촌 양극화 문제에 대한 타노스적 심판을 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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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쪽

 

온대지방에서 생존하고 점차 번영하면서 인류공동체는 주변의 생물학적 균형이 열대지방에 비해 비교적 단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략)

시간이 지나면서 온대지방의 인류공동체에도 생물학적으로나 인구학적 측면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여러 가지 질병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주변환경과 생태학적 균형을 바꾸려는 인간의 활동을 열대지역을 벗어나자 더 효과적이었다.

 

73쪽

 

세균과 바이러스는 세대간의 교체시간이 별로 길지 않기 때문에 숙주에 비해 유리하다. 병원체가 한 숙주로부터 다른 숙주로 완전히 전파될 수 있도록 유전자 변이가 생겨나는 과정은 사람이 유전적으로 주어진 신체적 형질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데 소요되는 시간에 비한다면 매우 짧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인간집단이 새로운 전염병에 비교적 안정된 관계를 갖게 되려면 최소한 120~150년이 걸린다.

 

270쪽

 

17세기 후반 잡초를 없애기 위해 순무와 자주개자리풀을 함께 심는 새로운 영농법으로 인해 자주개자리풀를 가축용 사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자 말라리아를 매개하는 아노펠레스 모기도 사람의 혈액보다 그들이 훨씬 더 좋아하는 소의 혈액을 충분히 제공받게 되었다. 종래에는 소가 많지 않아 사람의 피를 흡혈했던 모기들도 이제는 충분한 양의 혈액을 소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을만치 소가 늘어나자 유럽 각지에서는 사람에게 옮겨지던 말라리아 감염의 사슬이 끊기게 되었다. 그 결과 사람에게 옮겨지던 말라리아는 지중에 연안 지역으로 후퇴해버렸다. 지중해 연안은 여름철에 강우량이 적어서 가축을 기를만큼 충분한 사료를 생산할 수 없었다.

 

279쪽

 

종두를 받는 사람들은 천연두를 사는 사람으로 취급되고 흥정을 제대로 하려면 종두를 파는 사람에게 의식을 통해 일종의 선물을 주어야 했다. 종두는 대개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에 실시해서 누구나 흉터를 알아볼 수 있게 했다. 따라서 종두를 시술받은 사람은 일종의 의식을 마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의식은 일종의 상행위를 모방했지만 이런 민간요법이 대상들을 통해 소개되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caravan)무역에 종사했던 상인들은 특히 천연두 예방이 필요했다. 따라서 종두법이 보급된 지방에서 우선 이들이 듣고 스스로 시험해서 대상교역이 중요한 장거리 교역형태가 된 유라시아대륙과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일종의 민간요법으로 보편화되었다는 것은 쉽게 상상될 수 있다.

 

301쪽

 

(방역과 상하수도 등 보건위생의 발전으로 인해) 도시가 스스로 인구를 증가시킬 수 있게 되자 지방유입자에 의한 도시인구의 보충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다. 농촌에서 도시로 온 이주자들은 과거에 비해 더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만 했다.

 

농촌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도시에서 태어난 문화수준이 높은 사람들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는 농촌 이주자들에게 물려주었던 일들도 점차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맡게 되었다.

 

과거에는 도시 사람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주변 농촌에서 사회적인 신분향상의 꿈을 품은 농촌 이주자들이 쉽사리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회적 신분이동이나 유동성이 현저히 둔화되었다. 물론 상공업이 급속하게 발전된 지역에서는 도시에 많은 일자리가 생겨나 도시 태생의 사람들뿐 아니라 농촌 이주자들에게도 다 같이 일자리를 주어 큰 문제가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산업화가 늦은 지역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이동이 어려워 문제가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중략)

빈민굴은 도시주민이 빨리 죽어서 농촌 이주자들이 부족한 인구를 보충해 온 전통적 인구이동양식이 사라지자 생겨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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