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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9번의 일(2019)

독서일기/국내소설

by 태즈매니언 2020. 5. 26.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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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많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한국사회에서 '알바'가 아닌 '직장일'에 요구되는 노동자의 업무자세에 대한 평균적인 기준이 지나치게 높은게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요구하는 바에 따라 내 몫의 일을 하고, 내 몫의 일을 하기 위해 받은 일을 알맞게 칼질해서 다시 팀원들에게 일을 해달라고 내려보낸다. 허덕허덕 하루를 마무리한 날이면 가끔 떠오른다. 외국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일본 말고 다른 나라에도 보통의 기준치가 이리 높은 직장문화가 있을까?

 

한국에서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1,874만명의 사람들이 업종별, 세대별로 어떻게 직장생활을 하는지 나는 모른다. 사기업에서 잠깐 그리고 공공기관에 들어와 30대를 지나 40대 초입에 들어선 내게 가장 와닿았던 건 중국에 진출한 중소 조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혁진 작가님의 <누운 배>였다.

 

<9번의 일>의 주인공은 이름이 나오지 않고 마지막에도 '자회사의 78구역 1조 9번'으로만 지칭되었던 투미한 50대 초입의 남자이다.

 

소설은 통신회사의 설치 보수 현장직원으로 26년간 일해온 주인공이 저성과자 해고대상이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부부관계, 자녀관계, 친인척관계, 직장 내 업무능력과 평판관리, 자산관리 등의 모든 측면에서 주인공은 답답하고 어리숙하다.

 

직장에서 가장 맹하고 적당히 무시해도 되는, 없어도 좋은 정도가 아니라 그가 퇴사하면 그 급여로 똘똘한 신입사원 두 명을 고용할 수 있는, 호봉제가 있고 조직이 성장하던 좋은 시절에 들어와 노동법의 결계로 보호받고 있으면서도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눈치없는 사람이다.

 

난 직장 내에서 이런 사람과는 되도록 어울리지 않으려 한다. 이들의 모습이 내 10년, 20년 후의 모습이 될까봐 두렵다. 이들과 하나둘 공통점이 찾으면서 친근감을 느끼느니 이들의 정년퇴직 때까지 아무개라는 이름만 기억하는 사이로 보내고 싶다. 이미 그렇게 몇 명을 보냈고.

 

안다. 유전자와 인생의 여러 운빨 덕분에 대접 잘 받는 철밥통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제에 남들에게 고나리질하는 꼴이라는 걸.

 

나보다 훨씬 스펙좋고 억대연봉을 받던 모증권사의 투자은행 업무 직원들이 코로나19 등으로 일거리가 없어지자 콜센터 응대담당으로 배치전환되는 뉴스처럼 대출을 잔뜩 짋어진 나 또한 언제든지 그리 될 수 있다.

 

내가 똑똑해서 잘한 선택들보다 타고난, 그리고 어쩌다 얻어걸린 행운과 불운의 영향이 훨씬 크다는 것도 경험에서 배웠다.

 

그래도 나는 주인공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하라는 게 아니다. 적어도 나는 회사의 토끼몰이에 따라 '9번의 일'까지 내몰려서도 회사의 도구가 되느니, 다 포기하고 산에 들어가 자연인으로 살 것 같다. 50년을 살면서 한 번도 '자기답게 살기'를 고민해볼 겨를이 없었던 힘겨운 세대라서 그럴까?

 

김혜진 작가님의 의도가 있었겠지만 주인공이 준오의 전화를 받고나서 마지막에 한 행동의 개연성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 빼어난 작품의 아쉬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p.s. 항상 훌륭한 소설작품을 추천해주시는 한승혜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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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쪽

 

그는 지금껏 해온 이 일이 자신의 일이고 그 외에 다른 일은 할 마음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시 처음처럼 어떤 일에 매달릴 사진은 없었다. 새로 뭔가를 배우고 익히며 시간과 노력을 쏟을 자신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회사에 기대한 건 마땅히 자신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들이었다. 존중과 이해, 감사와 예의 같은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을 바란 것뿐이었다.

(당연하다니... 나는 회사에 이런 걸 바라게 되는 날까지 다니고 싶지 않다.)

 

205쪽

 

이게 당신들이 하는 일입니까? 좋은 일, 옳은 일, 그게 당신들 일이에요? 월급 얼마 받아요? 많이 받아요? 얼마든 주는 만큼 받고 살 수 있으니 좋네요. 고맙다, 훌륭하다, 칭찬도 듣고요.

(독후감을 썼지만 주인공의 이 이죽거림에 뭐라 대답을 못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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