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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 벌린/공진호 역] 청소부 매뉴얼(2015)

독서일기/북미소설

by 태즈매니언 2020. 6. 20.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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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소설 읽기는 잘 모르는 사람과 일대일로 벽을 두고 만나서 두 시간 가량 계속 이야기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 이야기가 지루하면 언제든 눈치 안보고 자리를 뜰 수 있는.

 

설명듣기는 좋아하지만 남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듣는게 힘들어서 매번 소설보다 비소설을 많이 보게 되지만, 그래도 즐거운 술자리에서도 자꾸 폰을 들여다보고, 이런저런 딴생각들을 하는 것에 비하면 남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는 드문 시간이다.

 

1936년생, 수시로 이사를 다녔고, 어린 시절 가족으로부터 학대와 방치를 받기도 하면서 칠레와 멕시코 같은 외국에도 살았던, 장애가 있고, 오랜 알콜중독자에, 여러 불안정한 일자리를 거쳤던, 세 번의 결혼 경험이 있는 네 아이를 키운 싱글맘,

 

나와는 도무지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이 루시아 벌린이라는 2004년에 작고한 분의 녹음된 독백을 듣는 느낌으로 43편의 단편소설을 읽어갔다.

 

초반이 좀 인내심을 요한다고 들었는데, 나도 밍숭맹숭하다가 100페이지에 나오는 열 번째 단편 <호랑이에게 물어뜯기다>부터 좋았다.

<응급실 비망록 1977>, <카르페디엠>, <모든 달과 모든 책>, <선과 악>, <멜리나>, <친구>, <들개:길 잃은 영혼>, <곤치에게>, <애도> . 이 작품들에 대한 느낌을 하루이틀만 지나도 거의 잊어버릴 게 뻔해서 아쉽다.

 

루시아 벌린의 외갓집이 있었던 도시이고, 소설의 배경으로 자주 나오는 도시 엘 패소(El Paso)가 어딘지 구글맵에서 찾아봤다. 뉴멕시코주, 옆나라 멕시코와 붙어있는 텍사스 주의 서쪽 끝에 있는 도시였구나. 시궁창 백인들과 세파에 찌든 멕시코인들이 서로 으르렁대는 광막한 사막 한 가운데의 대도시라니. 근처도 못가본 건 마찬가지인데 중국 감숙성의 가욕관이 떠올랐다. 엘 패소란 도시가 가축의 낙인처럼 평생 루시아 벌린을 따라다닌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동생 샐리, 존 외삼촌, 알콜중독자 엄마, 치과의사 외할아버지 등등 실제 루시아 벌린의 가족에서 따온 인물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단편집인데도 시점이 왔다갔다하는 장편을 읽는 느낌도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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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쪽

 

죽음은 치유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죽음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외롭게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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