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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 벌린/공진호 역] 내 인생은 열린 책(2018)

독서일기/북미소설

by 태즈매니언 2020. 7. 1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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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로 묶이지 않은 단편집.

 

주정꾼의 한이 담긴 횡설수설처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단편들도 좀 있었다.

 

루시아 벌린은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칠레에서의 귀족적인 생활과 그시절의 대학생이었던 그녀가 어떻게 스물한 살에 한 살짜리 아들과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첫 남편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한번도 책임을 놔버리지 않고 홀로 네 아이를 키울 수 있었을까?

 

<청소부 매뉴얼>을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아마 온갖 오지와 외국을 전전하는 광산 엔지니어로 살았던 아버지의 일하는 모습과 그저 견디고 견뎠던 아버지의 결혼생활의 영향인 것 같다.

 

짐을 잔뜩 진 노새처럼 묵묵히 발걸음을 내딛긴 했는데 아버지와 달리 루시아의 감수성은 예민했기에 술이나 마약이 절실했던게 아닐까? 자식들이 성장하고 콜로라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부터는 술과 약을 끊고 창작에 전념했으니.

 

왜 하필이면 1920년의 조선에 태어났는지 한탄했던 나혜석처럼 루시아 벌린도 미드 센추리의 뉴멕시코와 멕시코시티에 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나혜석도 서너 편의 소설을 남기긴 했지만 주로 거침없는 발언과 직설적인 산문으로 자신을 에워싼 제약에 곧바로 대응했다면, 루시아 벌린은 참고 참고 또 참으면서 자신의 인생사와 생각들을 짤막짤막한 이야기들로 빚어낸 것 같다. 루시아 벌린이 멕시코인들을 이해하면서도 싫어했던 것과 나혜석이 조선의 남정네들에 대해 가졌던 혐오감도 닮은 꼴이고.

 

<앨버커키의 레드 스트리트>, <양철 지붕 흙벽돌집>, <환상의 배>, <내 인생은 열린 책> 네 편이 가장 인상 깊었다. 넷 다 자전적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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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쪽

 

사실 내가 본 미래는 고된 삶이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르고, 버니는 제자와 눈이 맞아 나를 버리고, 나는 큰 충격을 받고 휘청거리다 복학해서 졸업하고, 그러다 보면 쉰이 다 되어 비로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할지 모를, 하지만 그걸 즐기기에는 이미 지쳐 있을 그런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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