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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 히데키/김진아, 김기연, 박수진 역] 한글의 탄생(2010)

독서일기/에세이(외국)

by 태즈매니언 2020. 6. 23.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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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서예를 배우기도 했었고, 주당 1시간 한문수업이 있어서 한자의 제자원리 - 육서를 배웠던 게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지도 한 장의 힘이 크다. 134쪽 지중해에서 태어난 북방 알파벳이라는 단음문자 시스템의 천 년 이상 희미했던 모음의 공극을 모음자모라는 선명한 게슈탈트로 충족 시킨 것이다.

 

천자문을 배울 때만 떠올려 봐도 한글로 인해 한자 학습의 부담이 얼마나 줄었는지 짐작이 간다. 한글없이 한자를 배우는 건 설명만 들으면서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신성문자)를 배우는 것과 비슷한 난이도가 아니었을까? 율곡 이이도 이런 언해본을 펴낸 걸 보면 최만리 부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글의 확산은 막을 수가 없는 흐름이었으리라.
<두시언해>를 통해 두보의 한시를 우리 말로 소리내어 읽어본 선비의 심정을 상상해보자.

예전에 이조훈님께서 추천하셨길래 사놨던 책. 10년 전에 나왔던데 강력한 내 올해의 책 후보다.

 

20대 때 언어학 입문서를 한 권 봤는데 거의 이해를 하지 못했다. 어느 지인에게 푸념했더니 그가 '언어학은 진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하는 학문'이라고 말하길래 기가 죽어서 그 이후로 언어학에는 전혀 관심을 안두고 살았다.

 

요즈음 동물들의 언어 지능에 대한 책들을 보다보니 관심이 생겨서 문자라는 인간 고유의 발명품에 대해 알고 싶어져 이 책을 보게 되었다.

 

대개의 한국인들은 한글이라는 문자체계의 발명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에 대해 학창 시절 국어수업을 통해 배웠고, 영화나 드라마 등을 통해서도 사골국물처럼 우린 국뽕을 충분히 들이킨 상태일 거다.

 

그런데 이 발명이 왜 위대한 것인지에 대해 언어학적으로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이 일본인 학자의 서술을 따라가며 보니 한글을 매일 사용해 온 내가 '각성'한 느낌이 든다.

 

이런 책을 한국인이 쓰긴 어렵다. 한자문화권의 자장에 있으면서, 자기네 말을 한자가 아닌 표음문자로 대체하는 불완전한 시도를 했던 일본인이기에 쓸 수 있었다고 본다.

 

71학번으로 미술을 전공했던 저자 노마 히데키씨는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웠고, 나이 서른인 83년에 한국어학 전공으로 다시 대학에 들어가 지금은 일본에서 독보적인 한국어 연구 및 교육자라고 하는데, 깊이 있는 서술과 숙연해질 정도로 방대한 참고문헌 목록에서 노고가 느껴진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말해진 언어'가 도대체 어떻게 '문자라는 시각적인 장치'를 통해 '쓰여진 언어'가 되는가? 라는 한번쯤 품어봤던 의문을 한글 창제의 원리와 과정을 통해 풀어주기도 하고.

 

초성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자모 'ㅇ'이 숫자 0과 같은 역할을 하여 생기는 효용, 훈민정음 반포 2년 후에 <동국정운>을 간행하여 한자음을 바로 잡고자 했던 세종의 의도, <두시언해>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정음의 가치 등등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보니 한국인들은 15세기에 '문명' 치트키를 한 번 쓴 효과를 누리고 있구나.

 

요즘 일본의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은데, 제2의 메이지 유신을 하는 심정으로 현재의 가나 문자체계를 버리고 한글과 비슷한 수준의 문자체계를 도입하는 것도 사회의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는 수단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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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쪽

 

한문훈독은 훈민정음, 즉 한글 탄생 이전의 <쓰여진 언어>로서의 한국어에 대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한문훈독>과 <훈 읽기>는 <형形-음音-의意> 트라이앵글의 <형-음> 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앞서 말했다. 한자를 단위로 보았을 때 <한문훈독>과 <훈 읽기>의 본질적인 메커니즘은 <형음의> 트라이앵글 위에 <타 언어라는 층>을 포개어 놓는 것에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144쪽

 

문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해당 언어의 모든 음소를 획정하고, 각각의 음소에 하나씩 자모(字母)로서의 형태를 할당해 주면 된다. 문자의 평면에서 서로 다른 자모는 음의 평면엣도 다른 소리가 되며, 그것이 각각의 의미를 구별해 주는 것이다.

놀랍게도 15세기의 <훈민정음>은 언어학이 20세기가 되어서야 마침내 조우한 <음소>라는 개념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정음>이 자모로서 하나하나 형태를 부여한 음의 단위는, 오늘날 우리가 <음소>라고 부르는 단위였던 것이다.

 

326쪽

 

정음의 자획은, 전서와 비슷하다고는 하나 붓으로 생기는 돌기가 없는, 거의 완전한 상세리프체(sans serif:장식이 없이 직선으로 이루어진) 즉 고딕체이다. 기필起筆도 종필終筆도 없어 - 기필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직선이기에- 붓으로 쓸 수 있는 모양이 아니다. 전서는 붓으로 쓰는 서체인데 비해 정음의 자획은 완전한 붓 쓰기를 거부한 형태인 것이다. 갈고리나 삐침도 부정하고, 두 글자 이상을 이어서 쓰는 연면連綿도 부정한다.

(중략)

문방사우로 상징되는, 문자를 문자로서 성립되게 만드는 <쓰기>의 수련 과정이나 기법은 '어리석은 백성'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그 수련 과정과 기법이라는 신체성까지도 거부한다는 것은 거기에 담겨 있는 정신성까지도 거부하는 일이다. 정음은, 붓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뭇가지로 땅을 끄적이기에 결코 부적합한 문자가 아니었다.

 

352쪽

 

현대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미학은 그 <형태>의 아름다움을 겨루고 있다. 역사에 등장한 <정음>의 <형태>가 왕조의 인쇄술과 함께했던 것처럼, 현대에 이르러 한글의 <형태>도 테크놀로지와 함께하며 다양하고 새로운 의상을 걸치게 되었다.

자모를 조합해 글자를 만드는 시스템, 15세기 조선 왕조에서 최만리가 <용음합자用音合字>라 부르며 경악한 이 시스템은, 컴퓨터의 시대가 되면서 더욱 풍요로운 가능성을 과시하게 되었다.

 

356쪽

 

문자란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 자에게, 이야기된 무엇인가를 과거에 이야기된 것으로서 읽게끔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훈민정음>이라는 책은, 그것을 펼쳐 읽는 이에게 문자의 탄생이라는 원초 그 자체를 만나게 하는 장치이다. 문자를 읽는 이에게 <읽기>라는 언어장言語場에서 그 문자 자신의 원초를 경험하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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