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작가를 유명하게 만든 <일간 이슬아>.
2,500만 원의 학자금 대출은 갚아야 하는데 원고청탁이 거의 없자 한 달에 1만 원을 내면 20일 동안 매일 한 편의 글을 이메일로 배달해주는 편당 500원의 구독서비스를 시작해서 2018년 3월부터 8월까지 만 6개월 동안 매일 랜선 독자들에게 남품했던 글들이다.
일간 연재라는 아이디어나 주5회 산문을 납품하는, 여느 순문학 작가 답지 않은 성실함이 이채로웠는데 전에 웹툰 연재를 했던 경험이 있었구나.
온라인 문학플랫폼 '던전'같은 시도가 성공해서 꼭 이렇게 좌판을 벌이지 않더라도 문피아나 조아라같은 순문학 구독플랫폼이 생기면 좋겠다.
<일간 이슬아>에 실린 글들 대부분은 소설이 되기 전의 쪽글 습작들이라 할 수 있다. 작가 스스로 소설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은 듯 싶지만 앞으로 멋진 소설가가 되리라 생각한다. 2018년 글을 전혀 수정 안하고 커버갈이만 해서 그대로 실은 것처럼 영악한 계산이 좀 과한 느낌도 드는데, 뭐 요즘엔 상업적인 감각도, 팔리는 작가의 재능이니 장점이 되겠지.
연재글들이 주변인물들의 말과 행동에서 추출해낸 요소들을 편집해서 경쾌한 크로키처럼 신선하긴 한데, 깊고 어두운 부분을 후벼파지 않는 느낌이었다. (다른 책에서 저자도 이런 점을 알고 있다고 반복해서 언급 한다.)
하지만, 어머니 복희와 아버지 웅이에 대해 쓴 글을 보면 이슬아 작가는 사람들의 더 깊고 어두운 부분을 다루는 소설을 충분히 써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 여유를 좀 찾았고, 파주로 이사했으니 이슬아작가의 소설이 기대된다.
연재된 글들 중에서 <물속의 당신>, <작업하는 당신>, <마담과 다이버> 세 편이 가장 좋았다. 산업잠수사라는 직업이 궁금하신 분들은 꼭 보시라. 정말 전문직이고 돈을 많이 받으셔야 하는 직업이더라. 그리고 요즘 역한 본모습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586 먹물들에게 염증이 났는데, 이슬아 작가가 전하는 학번이 없는 5X6 어머니 '복희씨'가 살아온 인생을 통해 인간의 품위를 느끼며 위로받았다.
말미에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들 중에 내가 가장 각별히 생각하는(불법복제 비디오테이프에, 동호회에서 번역한 한글대본을 출력해서 첫사랑과 같이 봤던..) 게 <귀를 기울이면(1995)>인데 92년생 이슬아님이 이 작품을 언급하니 되게 반가웠고. ㅎㅎ
매번 그렇듯 길지 않은 저자 서문과 후기가 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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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쪽
뭔가를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작은 가능성에도 성실해진다.
392쪽
세상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말하자 하마가 대답했다.
도달해야 할 세상을 믿는 것과 그게 이미 온 것처럼 수행하는 건 달라 보여. 이상적인 세상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잘 알아야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
하마는 멀리서 당부했다.
겁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467쪽
잘 혼자가 되려고 달리기를 해왔다. 글쓰기나 달리기나 누가 대신해줄 수 없다는 점이 비슷했다. 슬픔을 길 위에 버려가며 달렸던 날에는 몸에 있는 독기가 빠지는 것 같았다. 달리는 건 누구에게도 침범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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