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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화 : 아파트를 꾸미는 재미와 그 끝

아무튼, 농막

by 태즈매니언 2021. 2. 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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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농막>

 

1화 : 아파트를 꾸미는 재미와 그 끝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향집을 떠나 독립했습니다. 결혼 전까지 저는 기숙사-하숙-자취-잠자는 방-지역학숙-원룸-오피스텔-친척집-빌라까지, 고시원을 뺀 거의 모든 주거공간을 경험해봤죠. 하지만 그런 공간들에 애착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잠시 머무를 뿐인 거쳐가는 공간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신혼집인 일산 구축아파트와 직장 때문에 월세를 얻은 세종시의 구축아파트를 직접 꾸며보고, 분양받아 입주한 신축아파트를 인테리어공사 하나 없이 제 취향대로 스타일링 해보면서 기대 이상의 재미와 보람을 느꼈습니다.

 

옷을 사고 외모를 꾸미는 건 기본적으로 자기만족이지만, 인생을 이루는 ‘시간’들을 보내는 '공간'을 취향에 맞고 아름답게 가꾸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릴 수 있더군요. 힘든 하루를 마치고 돌아갈 곳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라면 금세 편안해지지 않을까요? 저는 나와 가족이 살고 있는 공간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가꾸는 것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유튜브 채널 '인테리어show'의 운영자가 말하듯 '집이라는 건 자신을 위한 전시장이자 자신의 삶이 담긴 곳'이니 수집가이자 큐레이터(전시기획자)가 되어보는 재미도 쏠쏠하고요.

 

비록 한국의 흔한 30평 3베이 구조의 아파트이고, 인테리어 공사를 하지도 않았지만 지금 사는 집을 어떻게 꾸밀지 2년 넘게 고민했고 계속 가꾸고 있습니다. 취향에 맞는 가구와 물건들로 채웠고, 의자 등받이에 겉옷을 걸어놓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단정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누리고 있지요.

 

그런데 이사후 1년이 지나니 더이상 별다른 변화를 주기 어렵네요. 외기에 노출된 발코니 공간이 없으니 마치 3D 정물화 같습니다.

 

현관문에서 지하주차장까지 엘리베이터로 이동해서 차로 출퇴근하다보면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일도 잘 없더군요. 실내에서도 잘 자라는 몇몇 관엽식물과 수조 속을 헤엄치는 열대어를 키우고 있지만 이들만으로는 생기가 부족한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습니다.

 

한 때는 제가 꾸민 미드 센추리 모던 스타일을 내추럴 스타일로 바꿔볼까도 생각해봤는데, 일시적인 기분전환이지 금세 익숙해지겠다는 싶어서 접었습니다. 야외 테라스나 넓은 외부 발코니가 있지 않은 이상 좀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가더라도 물건들이 늘어놓고 꾸밀 공간이 많아질 뿐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제 취향인 좋은 디자인의 가구와 물건들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고 그 상태로 계속 유지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왜 이럴까요? 제가 예전에 살았던 열악한 공간들을 떠올려보면 분명히 엄청난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게 맞는데 말이죠. 그저 익숙해진 것 뿐일까요? 계속 생각하다가 두 가지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첫째, 아파트가 지극히 효율적인 주거공간이다보니 가구 배치를 바꿔보는 것도 몇 번 해보면 한계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아파트가 벽식구조라 설계된 공간구조를 바꾸기 어려운 제약도 크지요. 그렇다 보니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대상은 다육식물, 분재 화분이나, 반려동물처럼 함께 사는 동식물이지 집이 아닙니다. 집을 꾸미고 난 다음에 계속 가꾸어 나갈 필요와 즐거움을 찾기가 어렵죠.

 

한국의 신축아파트는 르 코르뷔제의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라는 말을 실제로 구현한 현대 도시문명의 결정체로 세계에 자랑할만하죠. 간단한 청소와 쓰레기 버리기 외에 집의 유지관리에 필요한 일들은 주택관리사인 관리사무소장님과 직원분들, 계약된 회사들이 다 처리해주시니 부지런해지고 싶어도 일거리가 없습니다. 물론 청소도 보람있는 일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집에 오면 심심해서 소파나 침대에 눕게 되죠.

 

둘째, 신축 아파트는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매우 엄격합니다. 2006년부터 발코니 확장이 합법화되면서 거의 필수옵션이 되다보니 외부 발코니나 테라스를 가진 탑층이나 1층, 복층 세대가 아닌 여느 아파트는 다른 사람 혹은 자연과 교류할 수 없는 닫힌 공간이 되었습니다. 홈스타일링이나 인테리어 공사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죠.

 

이 아쉬움은 평일에 테라스가 있는 까페나 식당, 술집에 가고, 휴일엔 피크닉이나 캠핑, 여행을 가서 외부와 연결된 공간을 누리면서 해소할 수 있겠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꾸며두었기에 오래 사용하고 머무르고 싶은 나의 집을 떠나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아쉬운 일이지요.

 

이십 년은 더 직장에 다닐텐데 아파트에서의 쾌적한 주거생활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1주일에 하루 이틀은 오롯하게 나만 사용하는 내부와 외부가 연결되는 공간, 꽃과 나무를 잘 자라게 가꾸고 수확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텃밭과 정원을 일구며, 옆집과 위아래집에서 내는 소음에서 자유롭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 <나는 자연인이다>를 시청하면서 자연인에 잠시 빙의해보는 것 말고, 이 두 가지 욕심을 함께 채울 방법이 어떤 것일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꾸미는 공간이 아니라 가꾸는 공간이 갖고 싶어서요.

 

(2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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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 최고요(2017) 14쪽, 41쪽, 242쪽

세종시 금남면의 월세아파트

2019년에 분양받아 입주한 세종시 신축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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