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농막>
10화 : 텃밭과 유실수로 farmacy를
근교의 농촌에 세컨 하우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마음 먹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서 였고,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과일 나무를 심어서 수확하고 싶다는 열망이었습니다.
전 어릴 때 전남 보성군 조성면에 살았습니다.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셔서 오전에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에 있기 심심하니 동생들과 함께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외갓집에 가서 자주 놀았죠.
백 년된 농가주택인 외갓집에는 감나무(단감, 대봉감), 배나무, 자두나무, 무화과, 살구나무, 앵두나무, 보리수와 산수유, 석류나무, 밤나무, 대추나무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서 계절마다 열매가 영글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익어가는 과일을 바로 따서 먹었던 경험이 각별하게 남아 있네요.
이런 추억들때문인지 중학교 때 진로적성 심리검사를 했을 때 가장 추천했던 직업으로 '식물 연구원'이 나오더라구요. 연구직인 지금 직장에 만족하고, 식물에 계속 관심이 많은 걸 보면 정확했던 것 같습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님이 말하는 '슈필라움'이 제게는 생활과 연결되어 있고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나무를 심고 가꾸는 놀이공간인 것이죠. 나무가 잘 자라도록 돕고 선물처럼 그 열매를 수확하는 놀이 과정을 통해 제 생활이 더욱 행복해질 것 같거든요.
밭을 논이나 과수원으로 사용하는 것은 농지법상 형질변경 허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주말ㆍ체험영농의 정의에도 '다년생식물을 재배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니 밭에 일반 조경수가 아닌 과일나무를 심고 가꾸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농지법 제6조 제2항 제3호)
직장에서 분양해준 2평 가량의 텃밭을 2년 동안 분양받아 가꿔본 적이 있는데, 1주일에 2번 정도 가서는 제대로 관리가 안되더라구요. 비닐 멀칭을 하기는 싫은데, 그렇다고 그냥 두면 잡초가 엄청난 속도로 올라와서 김매기 하기 번거롭고요.
주말텃밭 경험자들이 4평 정도면 일가족이 먹을 야채는 충분하다고 하는 걸 참고해서 텃밭은 온실 내부에 4~6평 정도로만 만들기로 했습니다. 수확한 야채가 많아도 처치곤란하니까요. 실내 온실에서 키우면 비가림이 되니 관리도 편하고, 잡초도 덜 나겠죠. 상추나 시금치처럼 내한성이 강한 채소는 겨울에도 수확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바닥에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서 재배하는 건 앉아서 일하기 불편하니, 허리건강을 고려해서 벽돌로 틀을 만들어서 쿠바식 텃밭으로 만들어서 재배할 예정입니다. 공간이 좀 남으면 집에서 키우고 있는 귤나무 두 그루를 온실 안으로 옮겨 심어보고 싶은데 아무리 온실이라도 난방없이 겨울을 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일단 올해 겨울철 온실 내 온도를 모니터링 한 후, 내년에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유실수가 아닌 나무들 중에 심어보고 싶은 나무들도 있긴 하지만, 영농을 위한 곳이니 조경수는 배제했고요. 공주의 노지 기후에서 잘 자랄 수 있고, 농약 방제를 안해도 병충해를 잘 이겨내고, 전문적인 기술이 없는 일반인이 키워도 먹을만한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과일나무들을 찾아보니 선택지가 많지 않더라구요. 선택에는 어렸을 때의 추억도 꽤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모과, 살구, 플럼코트(사과와 자두의 교잡종), 대봉감, 블루베리, 앵두, 미니사과, 사과대추, 포포나무, 머루포도, 청포도, 호두나무를 심어보려고 합니다. 밀식하면 더 다양하게 심을 수 있겠지만, 나무들이 다 자랐을 때도 넉넉한 간격이 확보되도록 하려면 더 들일 공간이 안나오네요.
살구는 플럼코트의 수분수로 필요하고, 앵두는 붉은 왕앵두로 할지 더 달콤한 흰앵두로 할지 아직 못 정했고, 미니사과는 검증된 '알프스 오토메'로 할지 아니면 더 개량되었다는 국내 품종 '루비에스'로 할지 고민 중입니다. 포포나무도 묘목일 때는 영하 5도 이상으로 겨울을 나야 한다니 온실 내 화분에서 좀 키우다가 옮겨심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호두나무는 다른 나무들을 잘 못자라게 하는 성분을 내뿜는다니 외떨어진 곳에 심어야죠. 밤나무는 바로 앞 천변에 열 그루 넘게 있으니 뺐습니다.
충청도로 내려오니 좋은 게 국내 최대의 묘목 집산지인 충북 옥천군이 가까워서 직접 가서 골라올 수 있겠더라고요. 3~4월에 직접 가서 묘목시장에서 살펴보고 좀 비싸도 생착율이 높은 분묘(화분에서 키운 묘목) 위주로 골라올 예정입니다.
포도나무 시렁은 제방길을 통행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차폐해주는 효과도 있을 것 같아서 길가쪽으로 만드려고 하는데, 나무로 만드는 게 예쁘겠지만, 강관이나 각관으로 뼈대를 짜고 능형망으로 포도나무 덩굴들이 올라가게 해야 튼튼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심으면 6월초부터 11월까지 6개월 동안은 내내 열매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농막이 5월에 출고되니 그 때 심는 건 조금 늦는 것 같아서 배관공사와 농막 설치에 지장이 없는 가장자리 쪽에 심는 나무들은 3~4월에 미리 심어두고, 농막 주변에 심을 나무들은 화분에서 키우다가 농막이 설치되면 옮겨심을 계획입니다.
관리의 용이함과 내구성, 그리고 디자인 때문에 온실을 폴리카보네이트 고정식 온실로 하려고 했었는데, 미감을 포기하고 아래 사진과 같이 1//3 이하의 가격으로 3배 가량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고 차양공간, 창고공간, 비가림 온실공간으로 나눌 수도 있는 비닐하우스도 괜찮아 보여서 고민되네요. 비닐하우스쪽이 마을 주민들 보기에는 좀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할텐데 말이죠.
저는 이렇게 공주의 작은 밭에서 제 몸과 마음의 건강을 회복시켜주는 약국(farmacy : farm+pharmacy)을 꾸며보려고 합니다. 평생을 사무직으로 일하시고,따로 운동을 하지 않는 분들을 보면 나이가 들수록 육체의 활력이 부족한 느낌이 나더군요. 저도 운동을 싫어하니 이렇게라도 몸을 움직여서 건강한 텃밭 생활자로 살고 싶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의 변화가 오롯이 느껴지는 정원이야말로 잘 만든 정원이고 그 변화가 궁금해서 또 가고 싶어진다."는 말처럼 과일나무들이 저를 계속 공주로 가고싶게 만들어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11화에서 계속)
참고도서
<정원수로 좋은 우리 나무>, 정계준(2019)
<건축가의 정원, 정원사의 건축> 정상오,이성현(2016)
<겨울정원>, 김창훈(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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