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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 읽는 직업(2020)

독서일기/독서법창작론

by 태즈매니언 2021. 8. 2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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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반응이 좋았던 번역서들을 짜깁기해서 내놓은 자기계발서를 팔고 그로 인해 얻은 유명세로 자기계발 강연을 다니고, 서평잡이배로 얻어낸 신간서적 서평을 동원한 SNS마케팅으로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비법을 자랑하며 거들먹거리던 유투버를 저격하다보니 도서출판업에 종사하는 페친님들이 많아졌습니다.

 

한국의 웹툰과 웹소설 플랫폼은 100원 결제 시스템과 '기다리면 무료' 연재 모델 세계를 선도하고 있고, 기획과 편집을 맡아 웹소설/웹툰 연재작가를 돕는 팀단위 조력자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시대입니다. 1~2년 후면 카카오페이지의 연매출이 1조 원을 돌파하겠죠.

 

이런 시대에 연간 3.3조 원 규모의 출판시장에서 일하는 전통적인 출판사의 편집자는 2,500개의 거리이름을 알고 있어야 하는 런던 블랙캡 택시 운전사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하지 못하거나, 고급의 운송서비스를 원하는 소수가 고객이니까요.

 

그래서인지 작가와 번역가, 편집자들의 노동이 녹아있지만, 으레 찍는 초판 1쇄가 3천 부에서 1천 부까지 떨어져 버린 상황에도 책값은 제가 처음으로 읽고 싶었던 책을 직접 사던 코흘리개 시절에 비해 겨우 세 배 남짓입니다. 절대 비싸다고 할 수 없는 가격이죠.

 

다년간의 숙련이 필요한 독서라는 습관, 1.5배속 보기가 가능한 넷플릭스와 2배속 보기가 가능한 유튜브라는 경쟁자, 책장을 장만하고 꽂아놓느라 할애해야하는 공간과 도시의 임대료 수준을 생각하면 종이책을 출판하는 IP 공급자들의 고객인 독자들이 과연 늘어날지 의문이고요.

하지만 계속 쏟아져나오는 책들을 보면 세상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언뜻 보고는 이해하기 지식과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는 여전하고, 이러한 지식과 감정의 전달자로서 작가를 도와 정제된 글을 만드는 출판사 편집자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걸 이은혜님의 <읽는 직업>을 통해 배웠습니다.

 

저도 최근 출판권 설정계약을 하면서 처음으로 편집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작가나 논문을 쓰는 학자들 외에는 자기가 쓴 글을 누군가 편집해주는 경험을 해보기가 어렵지 않나요? 일기장 검사를 하던 담임선생님이나 고교 입시논술 첨삭 말고는요. 보고서는 '내 글'을 쓰는 게 아니니 뺍시다.

 

꾸준히 책을 읽는 습관을 갖고 계신 분들께 책이라는 독특한 상품을 기획하고 만들어내며 마케팅까지 하는 편집자가 하는 일들과 고민을 담은 이 책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민망할 수 있는 본인의 과거 경험까지 솔직하게 담고 있네요. 특히 <겨우 천 권만 팔리는 책들에 관하여> 챕터가 아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좋았습니다.

(와타나베 기요시의 <산산조각 난 신>을 구매한 천 명 중 한 명이 저에요!)

 

제 올해의 책 후보입니다. 인용하고 싶은 멋진 표현들도 많더라구요.

 

출판사에 이력서를 내는 신참 편집자들이 이은혜 선배 편집자님처럼 일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꾸준히 책을 사야겠다는 각오도 다져봅니다. 산 책 중에 얼마나 읽을지는 모르지만, 나도 메세나 클럽회원 못지 않은 문화후원자라는 자족감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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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지칠 줄 모르고 누군가를 또다시 좋아하게 되는 것이 편집자의 특성이다. 왜냐하면 글로 사람을 먼저 접하는 우리는 서로의 신상부터 파악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정체성의 핵심(글)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아하게 되는 속도도 빠르고 관계의 밀도도 높으며, 헤어지면 그만큼 커다란 내상을 입는다. 이별 후에도 책이라는 실물이 남아 옛 연인이 준 물건을 버리듯 할 수 없다. 한 때는 그 저자가 바로 자신의 일이자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197쪽

 

(전략) 딱 1,000명의 독자만 빼고는 이들 증언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런 책을 만들고 나면 딱 천 마리의 학만 접어 선물한 듯한 기분이 든다. 학을 더 이상 접을 수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운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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