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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토일] 바람과 햇볕의 집(2022)

독서일기/도시토목건축

by 태즈매니언 2022. 11. 3.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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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자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거실 통창 사진에 반해서 페친을 신청한 분의 책 출간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 읽으면 안될 것 같았는데 참지 못하고 바로 읽어버렸네요.
 
그리고 제가 예상했던대로 괜히 읽었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저는 절대 이런 아름다운 문장들을 쓰지 못하니까요. 저와 비슷한 소재와 경험을 재료로 해서 만든 이 책을 보고 나니 부끄러워져서 제 원고파일은 열고 싶지 않네요.
 
그간 꽤 많은 전원주택 건축주들의 건축 후기를 읽었습니다. 지식과 경험담 위주로 실용적인 조언을 해주는 고마운 책들이 대부분이었죠. 가끔 자신의 취향과 구상에 완성한 집에서 지내며 느끼는 감정까지 담은 에세이들은 더 각별하게 다가왔습니다.
 
<바람과 햇볕의 집>의 문장들에서는 다방면의 독서와 문화적 경험이 엿보이고, 바깥일하는 아내와 부업하는 주부인 남편으로 구성된 아이없는 부부 2인 가구의 하동군 화개면 귀촌 생활까지 담겨있습니다.
 
어린 시절 한옥 외갓집의 기억, 사는 공간을 꾸미는 취향, 스페인 신혼여행, 아이없는 부부생활처럼 저와 비슷한 부분을 발견해가면서 재미나게 읽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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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쪽
 
공사 도중, 계획에 없던 일들은 봄철 고사리순 돋듯 여기저기서 솟아올랐다. 바로 해결을 보지 않으면 문제가 사고가 되고, 사고가 절망이 되었다.
 
69쪽
 
정밀하게 설계된 계획들은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틈을 가지고 있었다. 틈 사이에 빗물이 고이고 흙이 쌓이고 이름 모를 풀씨들이 날아와 예상에도 없는 것들이 자랐다. 빈틈을 파고들어 자라는 것들의 뿌리는 계획의 본체에 금을 내기도 했고, 반대로 엉성한 계획을 다잡아주기도 했다. 때론 원본보다 더 멋진 사본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204쪽
 
화개로 귀촌하면서 말없이 견뎌야 했던 것들, 새로 얻은 직장에서 일어난 일들과 마음 쓸림들, 나에게 야속했던 부분들이 대개는 비유로 저만치 돌아서 내게 다가온다. 당장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겨울은 가고 봄은 오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시간 앞에서 용해되고 풀어져서는 애초에 문제가 아닌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아내의 속내에 밑줄을 쳐놓고 일상의 한쪽으로 접어 표시해 둔다.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아내에 대한, 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아내와의 저녁 산책은 그렇게 서로에게 접속해 온도를 맞추거나 서로를 독해하는 걸음걸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쪽의 단차공간, 공간의 주인인 편안한 이지체어, 앉았을 때 뒤뜰이 보이고, 창을 열면 남쪽으로 들어온 바람이 빠져나가는 바람길이 되는 낮은 프로젝트창, 콘크리트벽에 앵커볼트로 단단하게 심은 외팔보 계단에 답답하지 않도록 얇게 뽑은 금속 난간(높이도 살짝 변화를 준), 모던 디자인의 화목난로와 아름답게 마감된 연통접합부, 그 위에 놓인 무쇠 주전자까지. 부러운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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