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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집이라는 모험(2022)

독서일기/도시토목건축

by 태즈매니언 2022. 12. 10.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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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나가야 한다고 다짐했는데 아침 먹고 잠깐 침대에 누웠더니 벌써 해가 중천이라 다음 주의 저에게 일을 떠넘기고 책을 폈네요. <집이라는 모험>이란 제목과 띠지의 문장에 매료되서 어제 읽었던 책과 같이 산 신간입니다. 제목들을 어쩜 이렇게들 잘 지으시는지.

저자는 경기도 군포시 수리산 자락에 있는 저수지를 내려다보는 540평 대지 위에 지은 목창호로 된 오래된 이층 단독주택에서 12년 동안 세입자로 살아온 분입니다. 이 공간에서 세 아이와 두 마리의 개, 닭 열댓 마리,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면서 200평 규모의 텃밭농사를 지으며 글도 꾸준히 써오셨으니 대상포진이 올만했다 싶네요. 긴 시간 동안의 풍부한 경험들을 전해주신 덕분에 독자입장에서는 행복했지만요.

어린 자녀들에게 자연을 느끼게 해주고 싶고 마당에서 개와 닭을 키우며 작은 텃밭을 일궈서 채소를 수확해 직접 요리해 먹겠다는 마음으로 교외의 전원주택을 알아보시는 분들께 꼭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전원주택이나 귀촌생활자 커뮤니티의 연재글들도 많지만 이렇게 자기 집이 아닌 세입자로 한 집에서 10년 이상 지낸 경험이 있는 분은 드무니까요.

락토오보 채식주의자이자 생태주의자 성향의 저자가 차츰 현실을 인정하고 가사노동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가전제품들을 들이는 과정, 보기에는 보기에는 멋지만 단열이 제대로 되지 않는 오래된 단독주택에서의 겨울을 나고 유지관리하는 게 얼마나 품이 많이 들고 감내해야 할 것들이 많은지 잘 보여주고 있는 것도 미덕입니다.

저자 신순화님께서는 전원주택에 살며 집과 가정을 유지하는 주인장 역할을 무사히 잘 수행해오셨지만 보편적으로 가능한 사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파트생활에 만족했었고 12년 동안 평일이면 새벽 다섯 시 반에 차를 몰고 집을 나서서 밤 늦게 돌아오면서도 불평하지 않는 남편, 임대차계약 조건이었던 200평 텃밭 농사를 도왔을 친정부모님들, 그 기간동안 크게 다치거나 장기간 입원이 필요한 병치레를 하지 않았던 가족들, 전세금을 올려받기로 했으니 집을 비워달라고 하지 않았던 집주인과 같은 행운들을 누릴 수 있는 이들이 많지 않을테니까요

저자의 남편분께서 처음에 중병아리들을 데려와서 닭장을 만들고 키우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솜씨는 어설프지만 충분히 고민하고 자재값을 많이 들여서 튼튼하게 지은 제 닭장이 떠올라서 입꼬리가 살살 올라가더군요. 닭장과 치킨런이 충분히 넓은데 내년 봄에 몇 마리를 더 늘려봐야 하나. ㅎㅎ

이 책을 읽고 나니 혹여 제가 귀촌해서 단독주택을 짓더라도 마을 어귀의 평지에 크지 않은 단층집으로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굳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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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쪽

그렇다. 밖에서 볼 땐 다 멋지다. 누구나 쉽게 그 풍경에 자기만의 상상을 대입할 수 있다. 책임이 없으면 감상은 자유롭다. 그냥 머물다 가는 공간의 속살이야 알 필요가 있나. 그저 내게 보이는 것들만 누리면 되지. 그러나 사는 사람은 다르다. 남들에겐 낭만이지만 우리에겐 현실이고 생활이다. 직접 마주하며 살아가기 위해선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중략)
나는 자연 속에서 살고 그 안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서 이 곳에 왔다. 일거리는 넘치지만 자연도 넘친다. 그거면 충분하다. 몸과 마음을 열심히 움직이며 살 수 있는 집이다. 덕분에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며 살고 있다. 이런 삶은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뛰어들어서 내 이야기로 만들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우리의 이야기를 살아간다. 힘들어도 지루할 틈이 없는 집에서 날마다 모험을 누리며 살고 있다.

89쪽

타인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가면서도 그 노동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중략)
이 집에서는 모든 노동이 그대로 보인다.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이 보인다.
(중략)
내게 오는 음식을 고맙게 여기는 것, 그 음식을 가져다준 수고에 감사하는 것, 그 마음을 알고 오래 느끼는 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노동에 더 겸손하게 한다. 독립은 그런 노동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이 집에 오고서야 내가 일상을 누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동에 기대왔는지 알게 되었다.

103쪽

근사한 피트니스 센터에서 멋들어진 헬스 기구를 들어 올리는 대신 먼지 풀풀 날리는 사료 포대를 어깨에 져 나르는 게 폼은 덜 날지 몰라도 힘 기르는 덴 그저 그만이다.
(중략)
크게 힘들 일 없는 환경이 더 좋아 보여도 인간의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해낸 만큼이 선명하면 내 몸에 대한 자부심과 고마움도 커진다. 그런 몸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애쓰게 된다.

181쪽

우리가 함께 지켜본 죽음과 묻어준 동물은 셀 수 없이 많다. 십이 년간 개를 네 마리 잃었고 로드킬당한 길고양이도 여러 마리 묻었다. 길고양이들이 숨통을 끊어 놓은 까치와 까마귀, 약하게 태어나 오래 살지 못하고 떠난 닭들, 그리고 지난 겨울엔 아이들이 처음으로 사랑한 고양이 노랑이를 묻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우리가 만든 무덤이 있다. 함께 묻어준 추억과 이야기가 있다. 같이 슬픔을 나누고 마지막 길을 잘 보살피는 일에 아이들은 늘 최선을 다한다.
죽음은 결국 생명을 다시 보게 한다. 죽음을 무수히 보지만 그래서 더 새 생명 앞에서 감동하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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