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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츨라프 스밀/허은영, 김태유, 이수갑] 새로운 지구를 위한 에너지 디자인(2003)

독서일기/기후변화

by 태즈매니언 2022. 12. 28.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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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란 무엇인가>를 읽긴 했지만 정작 바츨라프 스밀이 생각하는 에너지 정책에 대한 언급은 생략되어 있길래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2003년에 출간된 책이라 무려 20년 전 이야기들이다보니 읽어야할지 말지 고민했는데, 저자 서문의 첫 문장부터 훅 치고 들어오네요. 다작을 하신 분이지만 서문에서 이렇게 말할 정도의 책을 안읽을 수 없죠. 


지난 100년 동안의 전세계적인 에너지 전환의 역사를 개관하고, 에너지에 기반한 각종 지표들이 경제, 환경, 인간 삶의 질과 가지는 연관성과 한계를 보여준 다음, 에너지 전환이나 가격, 수요와 공급에 대한 실패한 예측들(자신의 예측을 포함해서)을 보여주고, 화석연료와 재생에너지의 미래, 지구 생물권의 영속이 가능한 균형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무리 짓습니다.
1943년생인 본인이 보헤미아의 시골에서 땔감, 갈탄을 연료로 쓰며 살아오다가  미국과 캐나다에서 거주한 경험과 구소련 등 동구권, 미국과 중국 권역의 에너지 전환을 연구했기 때문에 일국의 시야에 얽매이지 않는 초국적인 시야가 강점이네요.

 

에너지 문제에 대한 예측들이 무용하다는 불신에 공감이 가는데, 극단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비상 대비 시나리오와 인간의 소망과 생물권의 요청을 조화시킨 지구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추진해나가자는 스밀의 메시지는 1997년  교토의정서부터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악까지의 갈팡질팡, 그 이후 국제정세와 주요 국가 내 여론갈등의 첨예화를 볼 때 개별 국가 내에서의 합의나마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의존했던 독일의 에너지 정책이 보여주듯 에너지의 수요공급은 지정학과 국제정치 사건의 영향을 크게 받는데 말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에게 효용을 주는 상품과 서비스는 계속 생겨날텐데 에너지 소비측면에서 지극히 비효율적인 물건과 서비스를 소비하고자 욕망하는 마음을 사회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은 21세기의 청교도주의와 유사해 보입니다. 전지구인이 스마트폰을 갖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퀘이커 교도처럼 사는 게 과연 가능할지. 

 

에너지 전환 정책에서 '파랑새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가격이 소비자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점진적으로 올라가서 소비 절약과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지속해나가는 방법이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선거로 정권이 교체되는 상황에서 이게 과연 가능할지.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2022년에 30조원의 적자를 기록한 한전의 올해의 에너지 생산단가를 보면 전기요금을 최소한 50%는 올렸어야 했으니까요.

 

에너지원별 가격은 계속 등락할테고 수력/지열같은 재생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나라, 화석연료 가채매장량이 많은 나라, 신재생에너지 발전 및 송배전 기술력이나 자원이 앞서있는 나라들 사이에 벌어지는 오리무중의 경쟁이 계속되다보면 언젠가는 안개가 걷히겠지요.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한 고민은 스밀의 <대전환>까지만 읽고 제쳐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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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쪽

 

우리는 가능성있는 결과에 대해 수동적이며 불가지론적인 예측을 삼가야 한다. 대신 인간의 존엄성 및 적절한 삶의 질 유지와 생물권의 대체 불가능한 통합성 보호의 조화라는 전일적으로 정의된 목표를 지향하는데 전력해야 한다. 미래는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것이므로, 바람직한 목표를 수립하고 그 목표를 향해 효과적이고 우회하지 않을 경로를 형성해나가야 한다. 
(중략)
그러므로 '무엇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가'보다 '무엇이 일어나도록 해야하는가'라는 규범적인 시나리오가 꼭 필요할 것이다.

 

432쪽

 

아무리 수수하고 심지어 소심하다 하더라도 덜 가진 채로 살도록 요구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 사상, 즉 단순한 성장이 아니라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연간 2~3%)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448쪽

 

생물권의 혜택이 영속될 수 있는 최대 지구  TPES(total primary energy supply)는 얼마인가? 그리고 괜찮은 삶의 질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인당 최저 에너지 소비량은 얼마인가? 이런 질문은 정말 드물다. 대답하기 유별나게 어렵기도 하거니와, 우리로 하여금 성장 위주의 경제 풍조와 양립하지 못하는 태도를 갖게 만들고, 명확한 도덕적 헌신마저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는 분명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정해야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효과적으로 참여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덕적인 의무로 다가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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