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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 공간의 미래(2021)

독서일기/도시토목건축

by 태즈매니언 2023. 6. 17.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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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성격때문인지 건축가는 제게 참 매력적인 직업입니다. 그래서 건축가분들이 쓴 책들도 즐겨 읽습니다. 개인이 사는 공간인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서는 일본의 건축사 나카무라 요시후미의 책들이, 한국사회의 공간과 도시에 대해서는 유현준 교수/건축사님의 책들이 특히 좋더군요.

이 책 <공간의 미래>는 코로나19가 준 충격과 미래의 주거와 도시공간에 대해 썼기에 팬더믹이 종료된 지금은 시의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시대의 한국인들이 널리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수려한 외모와 화술때문에 오히려 저평가되지만 유현준님의 글은 현상과 생각에 대한 표현이 매우 정확합니다. 제가 지난 몇 년 동안 도시와 공간에 대해 했던 생각들을 간결하게 정리해준 부분들이 많더군요. 반짝이는 생각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진 글이라 즐겁게 읽었고요.

스스로 말했던 '뇌가 썩는' 나이를 이미 지난 1959년생 유모 작가의 책보다 1969년생인 이 분의 책이 더 많이 읽히는 사회라야 희망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바로 같은 동의 가까운 곳에 있는 자주 봤던 (교회라 무시하고 지나친) 건물이 유현준 건축사의 설계작이라는 것도 수확이고요.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기록삼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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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쪽

아파트의 정원은 주변 이웃들이 다 내려다보기 때문에 편하게 사용하기 어렵다. 게다가 옷을 차려입고,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야 겨우 정원에 도달한다. 그런 복잡한 허들이 있는 것보다는 작더라도 그냥 간단한 옷차림으로 세수도 안하고 나갈 수 있는 내 집 발코니가 훨씬 더 쓸모가 많다.

47쪽

신축을 안 해도 되면 콘크리트나 철의 소비를 줄일 수 있다. 이는 곧 콘크리트나 철을 생산하는 과정 중에 엄청나게 많이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줄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친환경적인 건축은 세월의 변화에 살아남을 수 있는 기둥식 구조 건축이다. 이러한 기둥식 구조를 주거에서 활성화시킬 법적 제도가 필요하다.

53쪽

나무를 키워서 건축 재료로 사용하는 것은 탄소배출을 줄이는 소극적 자세가 아닌, 문제의 원인이 되는 대기 중의 탄소를 없애지는 일이다. 이만큼 적극적인 친환경 건축은 없다. 따라서 우리 도시의 고층 건물을 목구조로 만들 수 있다면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혁명이 될 것이다.

60쪽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간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중략)
횃불 스테인드글라스, VR같이 어느 시대나 당대 최첨단 기술은 상상을 공간화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69쪽

종교는 건축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으로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그 공간에서 시선이 집중된 곳에 선 사람은 권력을 가진 종교 지도자가 된다. 그 공간에서의 모임이 잦을수록, 그 모임의 규모가 커질수록 권력은 커진다.

80쪽

각종 예식, 등교, 출근, 예배 참석 같은 복잡한 행위들의 중심 원리는 '자유의 억제'다. 권력은 누군가의 행동의 자유를 억제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때 강화된다. 그리고 그러한 시스템은 권력의 구조에 새롭게 진입한 사람들을 의심의 여지없이 순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178쪽

인간이 이기적이기 대문에 소셜 믹스는 상대방의 배경이 어떤지 모르는 '익명성'의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도시 공간 속에서 익명성의 소셜 믹스를 가능하게 해 주는 장소가 공원, 벤치, 도서관이다. 이런 공짜로 머물 수 있는 공간에서 공통의 추억을 만들면 소셜 믹스가 된다.
(중략)
투쟁을 위한 모임이 아니라 즐기기 위한 모임의 공간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한강공원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공원은 크기보다 '분포'가 중요하다. 공원과 도서관은 어디서든 걸어서 10분 이내에 있어야 한다. 공원과 도서관들을 연결하는 길에는 벤치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공통의 추억이 만들어지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서 그런 땅을 찾을까? 재건축할 때 만들면 된다. 문제는 재건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정책은 개발업자와 타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180쪽

개발업자가 이익을 위해서 펜트하우스를 100억에 팔게 해 주고, 대신 우리는 1층에 시민들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100평짜리 작은 공원(pocket park)을 가지면 된다. 그리고 펜트하우스를 열 채 팔고 그 돈으로 1층에 시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1,000평짜리 도서관을 만들면 된다. 이를 촉진하기 위해 필요하면 부동산 가격 책정 방식이나 건축 법규를 바꿀 필요도 있다. 가장 좋은 시스템은 인간의 이기심을 이용해 좋은 세상을 만드는 시스템이다.

182쪽

우리 사회읨 문제는 공원의 분포가 문제였고, 아파트 단지 내 정원을 개방하면 공원의 분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아파트 정원을 개방시키기 위해 집집마다 마당 같은 발코니를 만들어 주면 되는 것이다. 개별 세대의 발코니가 우리 사회 문제 해결의 첫 단추일 수 있다.

208쪽

우리나라의 경우 이제 도시로의 인구이동은 완성된 상태다. 그렇다면 이제 LH가 해야하는 일은 새롭게 택지를 개발하는 대신 기존 택지의 효율을 높이는 일이다. LH의 업무는 바뀌어야 한다. 지난 50년간 녹지를 택지로 만드는 일을 했다면 이제는 반대로 택지를 녹지로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268쪽

시대에 뒤떨어진 원칙을 고집하면 공무원은 열심히 일하고도 도시의 진화와 발전을 방해하게 된다. 정부가 세금으로 낡은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창업 지원센터를 만들어 젊은이들이 공짜로 사용하게 해 준다고 창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프트웨어를 바꾸어 민간 자본이 투자되게 하는 것이 한 수 위의 방법이다. 적은 돈으로 창업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 행정 소프트웨어로 업데이트해야 한다. 그래야 다양성이 만들어지고 경쟁을 통해 우수한 DNA가 살아남기 때문이다.

271쪽

월세로 사는 것은 내 부동산 자산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내 노동의 대가가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대신 그 돈은 부동산을 소유한 누군가의 자산으로 축적된다. 월세는 21세기에 존재하는 새로운 형태의 소작농이다.
(중략)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정상적인 경제 상황에서 건강한 중산층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해서는 청년에게 임대주택을 공급하는 대신 부족하더라도 가급적 빨리 주택을 소유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275쪽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1층 위의 허공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하면서 국가의 부동산 자산 총량은 늘어났고, 공급이 늘어나자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공간이라는 부동산을 소유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아파트를 지어서 주택을 공급해 소유하게 한 것은 모든 국민을 지주로 만드는 혁명이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 나눠 주는 식의 피의 혁명이 아니라, 기술을 통해서 없던 자산을 창조해서 나누었던 진짜 혁명이었다.

279쪽

집값이 폭등하고 은행 대출 없이 집을 사야 하는 세상이 되면 두 집단은 좋아한다. 바로 대자본가와 정치가들이다. 빈부 격차가 커질수록 자본가는 자본의 집중을 얻게 되고, 정치가는 집을 소유할 수 없어서 임대 주택을 구걸하는 표밭을 얻게 되기 대문이다.

284쪽

우리는 30평 아파트 2세대를 부수고 30평 1채와 15평 2채를 지어서 3세대를 만들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용적률을 올려서 세대수를 더 늘려야 한다. 그래야 집값이 떨어진다. 그것도 소득 3만 달러 시대에 맞는 수준의 발코니도 있고 일인당 점유 면적이 적절한, 시장이 원하는 아파트를 개발해야 한다. 시장과 싸우지 말고 시장을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도시와 주거를 업그레이드하는 우리 세대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304쪽

세종시를 보면 도대체 어떤 부분 때문에 혁신 도시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눈에는 어디를 가나 자동차를 타고 가야 하는 엄청나게 높은 아파트만 많은, 그냥 지방도시일 뿐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야심차게 만들어진 혁신 도시가 이 정도니 다른 곳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지방에 만들어지는 신도시들이 모두 강남을 롤모델로 하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중략)
서울의 집중화는 지방의 개성이 없어진 탓도 있다.

307쪽

애초에 제대로 된 건축가에게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된다. 우리나라는 최초의 선정은 이상하게 해놓고 나중에 고치려는 제도만 잔뜩 만들어 놓은 모양새다. 그렇게 탄생한 시스템이 '자문'이다.
(중략)
좋은 아이디어를 자문으로 해주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 그 아이디어가 채택됐을 경우, 자문한 사람은 좋은 아이디어를 도둑맞는 것이다. 둘째, 그 아이디어가 채택이 안 됐을 경우, 시간 낭비만 한 셈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재능 기부 차원에서 사회를 위해서 해 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310쪽

재능 기부를 하는 선배들은 시장을 교란하여 미래를 망치는 것이다.
(중략)
우리 사회는 도덕성 경쟁을 그만두고 각 분야에서 실질적 경쟁을 만들어야 한다. 윤리 도덕만 강조하는 사회는 위선자들로 가득찬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문화 강국은 지적 자산이 재산이 될 때 만들어지는 거다.

311쪽

인간은 자연을 봐야 하며, 다양한 살마들 속에서 섞여 숨어서 쉬어야 하는 존재다. 구내식당 밥보다는 골목길을 걷다가 골라 들어가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선호한다. 그게 더 자기 주도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양한 사람과 만나고 융합하게 된다.

316쪽

나는 (대전 원도심의) 소제동에는 익선동식 상업화나 대규모 아파트 재개발 둘 다 좋은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도시를 완전하게 지우고 하는 개발은 기존의 공간적 가치를 잃게 한다. 그리고 익선동같은 힙플레이스가 되어 봐야 하나의 유행처럼 인스타그램의 세트장으로 소비되고 말 가능성이 크다. 그 둘이 아닌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오히려 이곳은 새로운 기업 타운이 들어서기에 적합한 곳이다.

344쪽

어느 날 멍 때리면서 게임을 하고 있는 아들을 뒤에서 바라보다가 아들이 왜 이 게임을 하며 쉬는지 깨달았다. 그에게는 메이플 스토리의 게임 배경 화면이 고향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스크린 속 게임 공간이 그에게는 내가 어려서 뛰놀던 골목길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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