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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뇌르마르크, 아네르스 포그 옌센/이수영 역] 가짜 노동(2018)

독서일기/인류학

by 태즈매니언 2023. 6. 23.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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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노동이라는 제목과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라는 카피에 매료되서 이 책을 샀습니다. 어차피 후기 산업사회에서 인간이 노동에서 어떻게 소외되고 삶의 의미를 찾기 힘들어지는지는 최근 작고하신 시어도어 카진스키 선생님이 <산업사회와 그 미래>에서 예언가처럼 설파하셨지만 좀 더 친절하게 풀어놓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거든요.
두 명의 저자가 덴마크인데 가짜 노동을 참을 수 없어 이런 책을 쓴 게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규제가 적은 덴마크 문화의 영향인가 싶더군요.
책 내용은 기대했던 대로였습니다. 짧았지만 의무경찰 복무로 곁눈질한 경찰공무원, 사기업, 지금 있는 공공기관에서 충분히 봤고 저도 하루 중 상당시간을 가짜노동에 쓰고 있으니까요.
특히 한국의 공공부문은 가짜노동을 너무 열과 성의를 다해 해서 문제입니다. 제가 붙인 이메일들처럼 기타 공공기관이라는 이유로 출연연 직원들이 1년에 11개의 온라인 교육을 켜놓고 멍하니 화면을 보다가 클릭을 하면서 시간을 넘기며 근무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은 온라인 교육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때, 호구지책을 위해 속성으로 강사 자격증을 딴 게 분명해 보이는 강사로부터 법정교육을 들으면서 어떻게 빨리 강당에서 도망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보면 자존감이 깎이는 느낌도 들더군요.
자기 분야 사업비 확보를 위해 근로자 법정교육 지정을 추진하고 공공기관에 교육시행 협조요청 공문을 뿌리는 부처 공무원, 자기들의 권한과 사업비를 늘리기 위해 비법정 교육프로그램까지 평가를 명목으로 욱여넣는 옥상옥 조직인 관리감독기관, 좋은 경영평가를 받기 위해 근무시간 혹은 개인시간에 의미가 솜털같은 온라인 교육 이수여부를 관리하는 인재개발팀 모두 한국의 성실한 직장인들인데, 이들의 가짜노동이 낳은 결과는 참.
물론 책을 덮어도 의문은 남습니다. 일한 시간이 아니라 일의 성과로 급여를 받으면 되겠지만, 과연 영업직이 아닌 사무직 서비스 노동자들에게 근로시간보다 적절하면서 쉽게 통용될만한 임금 지급 기준을 설정할 수 있을까요?
가족꾸리기조차 포기하고 있는 한국과 서구사회의 원자화된 개인들이 그나마 삶의 의미를 부여잡고 있는 일이 지금처럼 상당부분 가짜 노동으로 잠식된다면, 집단의 서사와 개인의 역할을 부여해주는 권위주의/파시스트 체제에게 패배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게 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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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쪽
이전에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지위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열심히 일하는 정도가 사회적 지위의 척도가 되었다.
177쪽
원칙과 규정은 사방에 있다. 회사는 IT, 인사, 홍보, 재정, 법무, 경리, 감사, 품질관리 같은 온갖 훌륭한 의도를 가진, 진짜 문제와 상상 속 문제를 풀기 위해 존재하는 '지원팀'으로 꽉 차 있다. 그리고 이 팀들이 매일의 핵심 업무를 방해한다. 그중 어떤 팀은 쓸데없는 곳에 시간이 낭비되지 않도록, 분별 있고 적절한 규칙을 시스템화하여 직원들이 서로의 일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종종 그들조차도 성가시고 장황한 절차를 들이민다.
233쪽
"만일 이미 직업이 있다면, 자신이 실제로 하는 일을 비판적으로 돌아보세요. 자신이 가짜 노동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징후를 발견하거든, 뭔가 다른 일을 하세요."
"왜 그래야 하죠?"
"가짜 노동은 개인의 도덕성과 자존감에 높은 비용을 소모시키니까요."
297쪽
가짜 노동을 의뢰한 자와 수행하는 자 사이의 암묵적 동의가 존재한다. 양쪽 다 이것이 가짜 노동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301쪽
"그들이 점검하는 많은 것이 따로따로 보면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모두를 조망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아무도 질문하지 않고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거대한 규제의 괴물이 되죠."
330쪽
가짜 노동은 동료 간에 금기시되는 대화 주제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머릿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중략)
"이렇게 금기시 되는 이유는 자존감 때문입니다. 현대 세계에서 우리 정체성은 어디에 달려 있을까요? 종교와 국가의 중요성은 쇠퇴하고 있기에, 이제 사람들은 일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자기 인식을 받치고 있던 깔개를 누가 잡아 빼면 기분 좋을 수가 없죠.
339쪽
할 일 없음의 공포를 막기 위해 본질적이지 않은 일을 더욱 많이 하면서 문제가 심각해진다.이런 의미에서 노동은 세계와의 상호작용이라기보다는 불안 관리 전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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