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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섭] 맘카페라는 세계(2023)

독서일기/에세이(한국)

by 태즈매니언 2023. 11. 16.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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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또 한 권의 <올해의 책> 후보를 발굴한 기쁜 날입니다.
제가 올해 2월에 사이드웨이 출판사에서 책을 낸 저자다보니 그동안 아무래도 같은 출판사의 신간서적을 추천하기는 어렵더군요. 한 권을 읽고 추천했는데 그것도 제 책이 나오기 전에 나온 책이고 나온지 1년쯤 지나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과 부제를 봤을 때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더라도 제가 흥미있어할 책이었습니다. 결혼 후 9년 동안을 맞벌이 부부로 살았고, 아이 없이 평생 둘이 살자고 고집해온 남편 입장에서 맘까페는 PC통신 시절부터 이러저러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경험해왔던 제게 미지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규모있는 맘까페를 5년 동안 운영해온 분께서 쓰신 책이라니. 못참죠!
역시 기대했던대로 흡입력이 좋은 책이라서 오늘 출장으로 서울을 오가는 열차 안에서 단숨에 완독했습니다.
제가 느끼는 도서출판 사이드웨이의 매력은 이 책처럼 아주 많이 팔릴법한 장르나 소재의 책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걸었던 '샛길'이 다시 자라나는 잡초 속에 묻혀버리기 전에 눈밝은 사람들에게 소개해주는 출판사라는 점입니다. 하나 더하면 저처럼 객관적으로 타율(?)이 낮을 수밖에 없는 무명의 첫 책 저자들을 꾸준히 발굴해주는 뚝심도 매력이고요.
저는 현재의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에 사는 한국에서 1차집단이라고는 각자 손에 든 스마트폰에 빠져들기 일쑤인 가족만 겨우 남았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지역공동체라고 해봤자 아파트 입주자까페와 맘까페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인류학자 정헌목님께서 <가치있는 아파트 만들기>에서 잘 다뤄주셨죠.
필명을 쓰신 저자께서는 맘까페의 역사와 기능, 공론장으로서 갖는 특징과 갈등문제 등을 실제로 올라오는 게시물 샘플을 보여주시면서 친절하게 알려주십니다. 맘까페라는 소재와 운영자 경험을 통해서 현재 한국사회가 처한 문제점을 진단하는 전개도 자연스러웠고요. 원천적으로 가입할 수 없는 신세라 그간 피상적으로만 알았던 제가, 저자님 덕분에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독특한 커뮤니티인 '맘까페'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혜석의 글을 맘까페 게시글 문체로 고친 글을 보고 저자께서 한국사회에서 모성의 문제를 얼마나 고민하셨는지가 느껴지더군요.
다만, 이 책에 두 가지 부분이 추가되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 어쨌거나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지는 와중에서 맘까페 회원자격을 가진 여성들은 혼외출산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에서 본인 또는 배우자나 그 집안이 가진 경제력이 대개 결혼제도 안에 안착할만한 중산층 이상이라는 점에서 '성에 들어가지 못한' 비혼여성들이 맘까페를 불편해할 지점들이 있다는 점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둘째, 저자께서도 여성들이 남성과 구별되는 공격성 표출방식이 있다고 인정을 하셨고, 여성들의 공격성 표출방식이 SNS의 영향력이 커진 시대에 보다 파급력이 높은 방식이 되었다는 점은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2021년 10월 6일 다음까페 기능 업데이트로 인해 밝혀진 '다중이글(글쓴이가 자신의 글에 스스로 댓글을 달아서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며 주작했던 게시물)들이 다수 드러났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성차'에서 기인한, 여론조작을 불사할 정도의 공감수집 행동이 배양되기 최적의 장소가 맘까페가 아니었을까? 하는 제 의문을 해소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책은 신선한 활어회처럼 출간 직후에(늦어도 1년 안에) 읽을 때 그 매력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전만 찾는 분들은 절대 모를 즐거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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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쪽
왜 나를 길러준 가장 가까운 사람, 엄마와 (육아방식을 두고) 이런 갈등이 벌어지는 걸까? 누가 내게 묻는다면, 육아는 개인의 가치관과 의학적 지식의 총체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적이라고 판단되는 것을 아이에게 꼼꼼히 적용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육아에서 실수는 용납되지 않고, 한없이 약한 아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가장 완벽한 방식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은 자신의 육아에 대하여 누군가의 조언을 듣기보다는 스스로 알아보고 검증하며 판단하는 게 편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112쪽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의 선택에 따라 여성이 남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추구하며 살 수도 있다. 바꿔 말해보자. 현대사회에서 여성이 엄마가 된다는 것은, 그전까지 성 중립적으로 겪어온 세계와 전혀 다른 것이 펼쳐진다는, 어떻게 본다면 전근대 시절보다 여성에게 자신이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확인하게끔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혼란 속에서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기준이 되는 집단'이 필요하다. 인터넷 속의 '맘카페'라는 공간은 그렇게 엄마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준거집단이 되었다.
205쪽
이들이 원하는 것은 결코 사적인 공감을 받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나는 약자'라는 프레임에 기대서 당면한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일을 귀찮아하고 회피하려는 심리를 가진 이들에게, 맘까페는 편리한 문제해결사다.
내가 그저 "저만 불편한가요?"라고 쓰면, 맘카페의 회원들은 알아서 공감해 주고 힘을 모아 집단적으로 공격해 준다.
(중략)
어쩌면 맘카페가 성장한 이유도 여성이 자신을 오랫동안 힘없고 약한 존재라고 여겨왔고,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약하고 수동적인 존재임을 은연중에 내재화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누군가가 맘카페에서 '약자가 아닌 강력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자기 효능감을 크게 느낀다면, 그런 사람들은 맘카페에 글을 더욱 적극적으로 올리게 된다.
286쪽
남성 자살률이 여성의 2.2배인 현실은 남성도 이 사회에서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힘들어 발버둥 치며 당장 죽고싶다는 사람들 앞에서 그동안 가부장제의 이익을 많이 봤으니 이제 부담을 나누자고 하면 와닿을 수가 없고 피해의식만 부추길 뿐이다.
저출산 정책에서도 남성은 분명히 소외되었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행복해질 수 있는 과정으로서의 육아와 가정일을 부담이 아닌 행복으로 재평가해야 한다. 양육과 가사를 부담과 고통이라고 서로에게 전가한다면 없던 거부감도 생긴다.
(중략)
남성이 정말로 가정이라는 정서적 공간에 충실할 수 있게 돕는 정책적 설계는 한없이 미흡해 보인다.
308쪽
우리 사회의 학부모들은 직접 이성 교제를 하느니 차라리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청소년기부터 연예인 팬덤에 지나치게 유사연애적으로 과몰입하는 현상은, 설령 그 현상의 건강한 측면을 인정하더라도, 분명히 이성에 대해 왜곡된 인식과 환상을 조장하고 심각한 외모지상주의를 조성하는 경향이 짙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청소년기 아이들의 사회화와 자아 형성에 심각한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누구도 지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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