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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윤] 도시인의 월든(2022)

독서일기/에세이(한국)

by 태즈매니언 2023. 11. 16.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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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올해의 책 후보.
<숲속의 자본주의자>(2021)로 인상깊었던 박혜윤님께서 2022년에 출간한 책. 출판사에서 붙인 제목이 판매에는 도움이 되었겠지만 책이 담고 있는 내용과는 안맞긴 하다.
유나바머 테드 카진스키에게 시골에서 함께 사는 가족이 있었더라면 메시아적인 편집증에 빠지지 않고 박혜윤님처럼 현대판 디오게네스라 부를 견유학파 사상가가 되지 않았을까? 이 책을 다 읽고나니 예전에 한 번 읽기는 했지만 공감하지 못했던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 책에 매료된 건 저자도 한때는 사회적 기대에 충실히 부응하고자 발버둥쳤던 사람이고,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농막과 취미농사를 지으면서 사회적 관습에서 살짝 벗어나 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놀이를 생활과 함께 양립해온 경험을 해봤기 때문인 것 같다.
내 올해의 책 중에서 수위에 놓일 것 같을 정도로 극찬을 했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한 박혜윤님의 비평도 인상깊었다.
이 책 내용 중에서도 ‘집안일의 철학 겸 교육관, 인생관’이라 대강 뭉뚱그릴 내용들이 가장 재미있었고. 수도원이나 절에서 신참들에게, 무림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무공보다 밥짓기와 청소부터 가르치고 시켰던 이유를 선해하면 단순한 집안일을 성실히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몸에 배어야지 그 분야에서 대성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기를 가능성(일종의 적성)이 높았던 경험때문이었을까? 용대운 작가의 무협소설 <태극문>처럼.
집안일에 대한 저자 박혜윤님의 관점에서 시작된 인생관이 ‘한곳에 마음을 모아 번뇌 망상을 끊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부동심의 경지를 거쳐 ‘우주 만유의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인 진여(眞如)의 경지에 도달하는 도반의 모습같아 불교철학과 이어진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 책에 관심이 간다면 <숲속의 자본주의자>를 먼저 읽고서 이 책을 보시길 추천드린다. 1부와 2부의 느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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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쪽
변화는 애도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사라진 미래에 대한 슬픔이다. 그 슬픔은 내가 가진 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생겨난다. 나의 일부와 작별하는 것이다. 그 작별을 조금 쉽게 만드는 방법은 그 과거를 나의 소유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아니라 나만의 이유가 있어서 좋아했고 그래서 내가 바뀌고 성장했다면, 그건 미래에도 함께 가져갈 수 있으니까.
176쪽
장난처럼 가볍게, 무엇이든 해보고 아니면 '어라? 아니잖아. 다르게 해볼까?'라고 생각하는 것. 이런 태도는 놀이를 통해서만 기를 수 있다. 그런 놀이를 같이 하기에 집안일만큼 완벽한 건 없다. 정말 신나는 놀이면서도 부모와 함께할 수 있는 놀이다. 놀이이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부담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의 질이 반드시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야말로 열중하게 되니까. 지루한 놀이는 없다.
(중략)
노는 것만큼은 남이 대신해줄 수 없다. 아이 스스로 삶에 대한 의욕을 갖는 건 놀이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 아이만 그런 건 아니다. 어른도 죽을 때까지 놀아야 사는 게 재미있어진다.
192쪽
하지 않으면 삶이 망가지지만 그렇다고 해도 별 보상이 없고 인정도 받지 못하는 일을 삶의 핵심에 두기란 쉽지 않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엄청난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집안일은 내가 선택했던 방법 중 하나였다. 모든 사람이 집안일을 나처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의 욕망이 향하는 사회적 성공을 위한 일이나 중요한 일들을 할 때에도 그 결과에 완벽하게 무심하면서도 집중할 수 있는 태도를 매일 실천할 수 있도록 연마하는 수단으로 택한 것이다. 그런 태도에 다다를 수만 있다면 수단은 무엇이든 좋다.
'어차피 안 될 거야. 그러니까 대강 할 거야. 그런데 계속할거야. 그렇게 멈추지 않고 계속하기 위해서는 몰입하고 집중해야 해.'
261쪽
(아이에게) 공부를 하라고 하지 않지만, 대신 대부분의 일을 스스로 하도록 놔둔다. 내버려 둔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주변 상황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가능한 선택들을 찾아낸 다음 그에 책임지도록 시간과 공간을 주고 지켜본다. 그런다고 공부를 하지 않고 놀기만 할까? 아이들은 이미 스스로 재미를 발견하고 결과를 책임지며 '노는' 일이 얼마나 세심한 노력이 들고 골치 아픈 일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아이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경쟁원리로서 학교 공부와 자기만의 자유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어른보다 빠르게 깨닫는다.
어떤 길도 결코 쉽지 않다. 거센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물론 어렵다. 그러나 자기만의 자유를 찾는 것도 이 세상 전체를 돌보고 관리하는 심정으로 치열하게 생각하면서 자기 책임하에 결정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자연에서 마음껏 놀게 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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