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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아] 오래된 매력을 팔다(2023)

독서일기/에세이(한국)

by 태즈매니언 2023. 11. 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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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6.5만의 부여군에서도 여행객들이 주로 들르는 궁남지나 부소산성, 백제문화단지 등 주요 관광지와 멀지 않은데도 옛날의 영화를 뒤로하고 퇴락해가던 시골 마을에 불과했던 규암면 자온길. 요즘 부여에서 눈밝은 이들이 추천하는 곳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을 지금처럼 꾸민 분이 한 명의 외지인이셨군요. 3천 평의 땅에 위치한 16개의 옛 건물들을 되살려서 조성하신 분이 자신의 경험과 소신을 정리한 책인데 로컬 크리에이터의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릴 때부터 미술과 공예에 관심이 많았고 미대 진학을 준비하다가 마침 그 때 부여에서 개교한 문화재청 산하의 특수목적 국립대인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공예를 전공하고, 20대부터 알바로 모은 천 만원을 종자돈으로 인사동 쌈지길에 가계를 차려, 가장 어린 나이의 대표로 15년 이상 높은 매출을 올리며 활동하면서, 성북동 집과 공예 갤러리 매장 건물을 소유할 정도로 마케팅 감각이 있는 성공한 공예인이었던 박경아님은 전통공예가 박물관에 박제된 채로 쇠퇴해가는 상황에서 이를 생활 속으로 이끌어오는 시도를 하고픈 공간을 찾다가 규암면 자온길을 발견합니다.
이 책이 돋보이는 점은 개인의 성공담을 자랑하기보다는 자신의 성공의 원동력 중에서 로컬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후배들이 명심해야할 사항에 대한 당부사항과 경계할 점들을 일러준다는 점입니다.
가급적 일찍부터 부동산을 보는 안목을 길러라, 건물 리모델링과 F&B 매장 운영 노하우, 온오프라인 행사들을 통한 홍보의 중요성, 지자체 지원사업을 요청했는데 막상 지원금이 나오고 사업조직이 꾸며지자 배제되고 부동산 투기꾼으로 음해를 당해 곤란했던 경험, 투자를 받기 위해 액샐러레이터와 계약을 했다가 4건의 지난한 소송을 겪으며 그 과정에서 횡령/배임 혐의자로 의심받았던 경험들 모두 비슷한 시도를 꿈꾸는 분들에게 아주 소중한 조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첨부한 사진은 자온길에 위치한 <자온양조장>에서 오늘 제가 찍었습니다. 규암면이 수운 중심지로 아직 번성하던 개화기에 근동에서 제일 가는 부자이자 양조장 주인의 근대한옥과 양조장을 되살려서 술집과 한옥스테이로 활용하고 있더군요.

 

옛 공간과 공예의 매력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 철저하게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인구 10만도 안되는 쇠락한 지역을 사람들이 찾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꾸며가고 있는 박경아 대표님이 이뤄낸 것들이 궁금하신 분들께 부여군 규암마을 방문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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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저도 집에서 100년 넘은 가구들을 쓰고 있어요. 그걸 보면서 느끼는 건 고가구가 실제 우리 생활에 쓰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너무 아름다운 오브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랜 생활동안 우리 곁에서 빛나고 사랑받는 기물이 그야말로 명품이 아닐까요? 이처럼 오래된 것들의 가치, 정성으로 빚어낸 것들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일을 계속해 나가고 싶어요.
74쪽
원래 규암은 오래전 백마강에 배가 드나들던 때만 해도 200가구 이상이 거주하고 매우 번성했던 마을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점차 도시로 떠나며 텅 빈 상가와 오래된 빈집만 과거의 영화로웠던 흔적을 간직한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이처럼 버려진 공간이 서점이 되고, 공방이 되고, 문화숙박시설이 될 모습을 그려보니 마음이 설렜다. ’스스로 자‘와 ‘따뜻할 온’을 쓰는 자온길, 말 그대로 사람들의 온기로 스스로 따뜻해지는 거리를 만들고 싶었다.
111쪽
나는 홈쇼핑을 보면서 그들이 어떤 표정과 어떤 말투로 어떤 멘트를 하는지까지 열심히 복기했다. 홈쇼핑 호스트들이 얼마나 치열한 멘트를 고민했겠는가. 내가 팔고자 하는 분야와 흡사한 제품 소개 영상을 보기만 해도 너무나 좋은 교재이자 1시간짜리 강의가 된다. 세상에 좋은 물건은 너무 많기 때문에 경쟁이 되려면 스피치 연습을 해야 한다. 좋은 제품을 혼자서만 만들고 간직해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112쪽
쌈지길을 개척해서 아티스트들이 저렴한 투자금에 수수료 베이스로 창업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신 분이 쌈지의 천오균대표님인데, 나에게는 항상 선구자같은 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아트 마케팅을 최초로 도입했고, 음악 페스티발을 최초로 개최한 곳도 쌈지다. 나의 많은 기획과 영감이 쌈지길의 경험에서 만들어졌다. 부동산부터 공사, 공간 운영, 제작, 유통 등 그야말로 모든 경험을 자온길 프로젝트에 그대로 녹여내고 있는 셈이다.
115쪽
애초에 창업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를 원하면 오히려 퇴근시간이 정해져 있는 직장에 다녀야 한다. 창업을 하면 일이 그대로 내 삶이 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아이템으로 창업을 하면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창업하는 것은 말리고 싶다. 유망한 아이템이 아니라 내 삶에 워라밸이 사라져도 될 정도로 좋아하면서 몰두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고난을 이겨낼 수 있으려면 최소한 좋아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면서도 빈 집을 고치는 꿈을 꿨다.
159쪽
지역 창업은 절대 느긋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에, 청년들이 지역에서 자리잡기까지 긴 기다림을 강요할 수는 없다. 다만 로컬 창업에 도전하는 청년들이 있다면 설령 3개월, 6개월만 하고 그만두더라도 시도 자체를 응원하고 붇돋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20대, 30대 청년들은 어떤 일을 생각했다가 또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시기다. 지역에서는 예산을 지원하고 기회를 줘도 금방 떠난다고 생각하여 실망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회를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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