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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런 에반스/나현영 역] 유토피아 실험(2015)

독서일기/에세이(외국)

by 태즈매니언 2024. 1. 26.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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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구상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도시화된 지역인 도쿄의 시부야 근방을 엿새 동안 여행가며 문명이 주는 혜택들을 누리고 와서 유나바머 카진스키의 현대문명 비판 선언문을 읽고 심취해서 현대문명 종말 이후를 대비한 공동체 실험 실패담에 대한 책을 읽었네요.
저는 실패담이 성공담보다 널리 읽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성공담은 신이 나서 쓸 수 있지만, 나의 쓰라린 실패를 소처럼 반추하면서 그 고약한 발효취까지 삭혀서 글로 정리하는 건 힘든 일이고, 자신의 평판에도 그다지 도움이 될 일이 없으니까요.
디시인사이드와 같은 익명커뮤니티들의 게시물들이 재미있는 이유는 자신의 찌질하고 어리석었던 실패의 기록들을 솔직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이 있는 로봇을 연구하던 AI분야의 과학자가 지구종말론자(doomer)이자 생존주의에 사로잡혀 스코틀랜드의 황야에서 현대문명이 붕괴된 상황에서 살아남는 실험을 1년간 주도하게 됩니다. 그는 당초 18개월로 계획했던 자신의 실험을 감당하지 못했는데, 정신과 치료를 받고서 다시 학계와 일상생활로 복귀하면서 깨달은 것들을 이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학계의 커리어를 끝내고 소유하고 있던 집을 팔고 자기 돈을 들여서 한 실험이기 때문에 연구비를 따내서 연구책임자로 실험하고 관찰한 사례와는 확실이 다릅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걸었던 2006년의 실험이었기에 그 실패를 책으로 만들어내는데 무려 9년이나 걸리긴 했지만요.
과학적 사고를 신봉하던 무신론자가 어떻게 점점 시야가 좁아지고 지구종말론에 심취하게 되는지, 리더쉽, 농업과 서바이벌 스킬을 전혀 갖추지 못한 책상물림이 생존주의자 캠프의 리더가 되었을 때 겪게되는 온갖 문제들, 인생을 뒤흔드는 쓰라린 실패를 겪은 사람이 어떻게 취약하고 위태스러운 멘탈을 추스리고 일상으로 복귀하는지에 대해 알게 해준 유용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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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쪽
습득은 빠른 편이었으나 곧 내 능력 밖의 벽에 부딪혔고, 1~2년은 어찌 버틴다 해도 결코 이 분야의 전문가나 주요 연구자가 될 수 없음이 점점 분명해졌다. 유토피아 실험은 어디로도 가고 있지 않은 길에서 우아하게 탈출하는 걸 돕는 거짓 핑계가 아니었을까
98쪽
우리 선조들이 그랬듯이 대가족을 이루어 사는 것과, 낯선 이들 무리에서 꼬박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게다가 후자의 경우엔 싫은 사람에게서 벗어날 기회도 별로 없다. 이런 한정된 공간은 질투와 분노가 퍼져 나가기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은 친밀한 마을 생활을 동경하지만, 막상 어디 구석진 시골에 처박히게 된다면 대개 곧 도시 생활의 익명성을 뼈저리게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239쪽
부유한 나라에서 일상을 영위할 때 특별히 의식하기 힘든 것이 바로 이 화장지나 치약, 비누 같은 사소한 일상용품의 고마움이다. 문명이 붕괴된 이후 어떻게 살아갈지 상상만 할 때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실제 행동에 옮기고 나서야, 즉 문명이 이미 붕괴된 것처럼 살기 시작하고 나서야 이 사소한 세부 사항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 사소한 부분들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함이 드러난다.
260쪽
남아공 출신인 토니는 로이터통신에서 일하며 소말리아와 짐바브웨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그는 진짜 재난과 빈곤을 목격한 사람의 눈으로 유토피아 실험을 바라보았다.
"피크 오일 이후의 삶이 어떤지 알고 싶다면 아프리카를 보면 돼요." 그가 말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은 이미 결핍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우리는 이전 자원자들이 가져왔다가 놔두고 간 다섯 가지 종류의 식물성 기름과 진귀한 향신료 꾸러미들을 부엌 선반에 갖춰놓고 설득력 없는 연극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애그릭이 탁자 위에 놔둔 핸드크림이 모든 사정을 말해주었다.
292쪽
2010년 자원자들이 아직까지도 내가 유토피아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언젠가 문명이 최종적으로 붕괴되는 순간 제정신을 차리면 다시 한번 그들 모두를 이끌고 종말 이후의 미래로 인도하리라는 내용이었다.
(중략)
광신적 종교 지도자의 첫 번째 요건은 자기가 한 헛소리를 스스로 믿는 것이다. 확고부동한 신념을 지닌 사람은 놀랍게도 엄청난 설득력을 지닌다. 비록 정말 말도 안 되는 신념이라 해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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