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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숙]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2017)

독서일기/의학

by 태즈매니언 2024. 3. 2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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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대 중반이 되어서야 운동의 즐거움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이 나이가 되니 사고가 아닌 중증질환으로도 언제든지 갑작스럽게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환자가 되면 제게는 멀게만 느껴졌던 중환자실을 이용할 일도 생길테고요.
친지들의 죽음을 많이 겪은 것은 아니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 가장 끔찍한 죽음은 온갖 관들과 호흡보조 장치들을 몸에 주렁주렁단 상태로 중환자실에 오래 입원에 있다가 맞이하는 죽음이 아닌가 싶더군요.
저는 자신의 품위는 물론 가계의 비용이나 중환자에 대한 의료자원의 측면에서도 중환자실은 회복가능성이 낮은 환자들의 연명치료에 낭비되도 좋은 시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학병원 중환자실 간호사로 19년을 일하셨고, 현재는 간호학과 교수로 일하고 계시는 김형숙님께서 쓰신 이 책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중환자실 간호사로서 저자가 경험한 것들을 전해주시는데 '생명의료윤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해줬고, 저같은 의료계 문외한들에게 대학병원 중환자실이 어떤 공간인지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유용한 책이었습니다.
저는 조만간 가까운 세종 충남대병원을 찾아가서 기도삽관과 심폐소생술을 거부하는 내용으로 사전연명치료 의향서를 작성하고자 합니다. 따로 비용을 받지도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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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쪽
나와 동료 간호사들은 환자들의 죽음 자체보다는 끝도, 의미도 알 수 없이 환자들이 견디어 내던 그 시간들을 힘들어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한편에선 오래 기억에 남아 나를 괴롭히는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중략)
20년 가까이 최첨단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사망하는 환자들을 지켜보면서 혼란스러웠던 순간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아직도 '그때 이래야 했어.'하고 명쾌하게 결론지을 수 없는 순간들도 많다. 다만 늘 우리 모두가 너무 비겁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의료진은 결정적인 순간에 '가족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명분 뒤로 숨었고, 가족들은 혹시나 작은가능성이라도 놓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늘 '최선을 다하는' 선택을 하는 것 같았다. 결국 죽음으로 끝나건 호전되어 퇴원하건 그 시간,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은 환자들의 몫이었고, 죽어간 이들이 보낸 메시지는 대부분 중환자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264쪽
내 생각에 임종을 앞둔 보호자들이 환자와 잘 이별하려면 환자와 함께 그 시간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가만히 환자의 상태를 지켜보다 변화가 생기면 부리나케 의료진에게 달려가는 식으로는 보호자들이 관찰자나 감시자의 역할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중략)
"물수건으로 환자분의 몸을 자주 닦아드리고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세요." 이건 구경꾼처럼 중환자를 지켜보는 보호자들에게 내가 자주 권유하는 '대화법'이었다.
중환자의 보호자들은 스스로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낄 때 간호사들에게 날카로워졌다.
290쪽
나는 이제 우리가 보라매병원 사건 후유증에서 좀 벗어났으면 좋겠다. 회복 가능한 환자가 아니라 의학적으로 회복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환자를 퇴원시키는 것도 안 된다면 마지막 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는 입원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아서다.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Hopeless Discharge 판단 시점은 진단받은 주요 질환을 치료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추가적인 합병증의 예방이나 상태 악화를 막는 데 주력하는 시점, 다만 죽음을 늦추기 위해 보존적인 치료를 시작하는 때이다.
300쪽
건강할 때 혹은 간호사로 일할 때 생각했던 것들과 중환자로서 내가 경험한 것들이 많이 달랐다. 간호사로 일할 때, 나는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이 옆에서 격려해주면 환자에게 힘이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중환자실에 누워 보니 가족들이나 가까운 이들의 방문이 무엇보다 나를 지치게 한다. 밖으로 향하는 모든 에너지를 모아 숨을 쉬고 계속 잠으로 기운을 보충하고 있는데, 방문객들은 내 몸의 패턴과 상관없이 그 흐름을 깨고 들어왔다. 깊은 잠에 빠진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은 매번 울음소리나 걱정스런 목소리, 손으로 전해지는 불안함이었다. 면회 시간마다 나는 제발 어서 이 시간이 끝났으면 했고, 그 모난 내 마음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기진맥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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