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권이 생긴 이래 매번 후보자나 정당들 중에 그나마 덜 나쁜 선택지를 골라서 투표해왔지만, 어제 4월 10일 국회의원 선거 공보물을 받아보고선 전례없는 현타가 왔습니다.
제가 선거권을 가지고 있는 세종시갑 선거구는 신도시 지역이라 민주당이 강세를 띠는데, 예비후보 4인의 당내경선을 통해 선정된 후보가 경선당시와 달리 선관위에 신고한 재산내역이 '아파트 4채, 오피스텔 6채'를 보유한 갭투자 달인으로 확인되었더군요. 후보자가 '재산보유현황 허위 제시에 따른 공천 업무 방해" 사유로 당에서 제명되면서 민주당은 세종갑 선거구에 후보를 내지 못한 상황입니다. 2번과 6번 나머지 지역구후보의 면면도 참...
이게 저희 지역구의 이번 총선만은 아닐겁니다. 정치이야기가 참 피곤하고 보다 나은 정치인을 찾고 응원한다는게 부질없게 느껴진다는 심정이 널리 퍼져있는 것 같네요.
그래서인지 동경대와 MIT에서 공부해서 데이터 알고리듬을 사용해 비즈니스와 공공정책을 디자인하는 데이터과학자인 저자 나리타 유스케의 상상이 고대 그리스, 중세 이탈리아 중북부, 그리고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했던 것처럼 이 시대에 맞는 시의적절한 논의주제로 다가왔습니다. 앞선 세 번의 시도 역시 당대에는 미친 짓처럼 여겨졌을테니까요.
요즘 민주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얼마나 엉망이고 빠르게 더 나락으로 가고 있는지와 조금씩 고쳐쓰거나 아예 탈출할 수 없는지를 검토한 제1~3장은 빌드업이고,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133페이지부터 시작하는 제4장에 60페이지 정도로 축약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다 읽은 저는 저자의 무의식 민주주의 알고리듬에 의한 정치인의 종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정치는 논리가 아닌 욕망에서 뻗어나온 권력행위이며, 지금까지 축적된 인류지식에 기반한 AI가 전 국민의 일반의사를 가장 효율적으로 대표한다고 하더라도 반AI 선동가들은 어디서나 출몰할테니까요. 게다가 저는 언젠가 발생할 인류의 절멸이나 지구의 종말이 AI보다는 불완전한 인류의 선택으로 인해 초래되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거든요.
하지만, 무수한 트럼프들이 리더가 된 민주주의국가, 페르시아 신정제국이나 전체주의 중화제국, 이 중 어느 나라에서도 살고싶지 않다면 저자와 함께 더 고민해봐야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이러다 세계체제가 망가진 아포칼립스 세상이 닥쳐서 다시 한 번 1만 년 전처럼 부족단위의 리셋과 축의 시대를 다시 겪어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그나저나 번역자가 서유진, 이상현님으로 두 분이고, 역자후기도 함께 쓰셨길래 특히하다 두 분께서 부부셨군요. 부부가 함께 육아 말고도 이런 공동프로젝트에 도전하는 모습이 좋아 보입니다. 덕분에 저도 출간될 신간의 원고를 미리 읽어보고 추천사를 쓰는 경험을 해봤고요. 목차와 서문보다 미리 본 독자들의 추천사를 앞에 배치한 편집도 신기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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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쪽
인터넷과 SNS로 인해 민주주의라는 '거울'은 과도하게 잘 닦였고, 그 결과 여론이라고 하는 생물을 '모공' 속까지 비추어보게 됐다. 인간 집단이 얼마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버티지 못하는 존재인가가 민주국가에서 백일하게 드러났다.
74쪽
사람도 정보도 빠르게 이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만들어졌다. 이동에 따른 비용, 정보나 의견을 교환하는 비용도 모두 컸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해진 날짜와 장소에 모여 의견을 주고받고 집계하여 이를 발표하는 축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 축제가 바로 선거다. 선거는 국가나 공동체로서의 일체감을 빚어내는 일종의 '효모' 역할을 했다.
155쪽
무수한 채널과 센서로부터 추출한 민의 데이터의 앙상블 위에 싹튼 것이 무의식 민주주의다. 무의식 민주주의는 언제든 접속할 수 있는, '선거 없는 사회적 선택'이라 부를 수 있다.
'일반의사'가 포함된 비정형 데이터를 넣어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무의식 민주주의의 알고리듬이다.
(중략)
무의식 민주주의 알고리듬의 학습, 추정 및 자동 실행 과정은 모두 공개되어야 한다. 이는 선거 규칙이 공개된 것과 같다. 항상 오픈스소 개발 커뮤니티가 알고리듬을 검증, 갱신하면서, 블록체인 기술에 근거한 자율 분산형 조직형태로 움직인다.
179쪽
기계가 인간을 지도하고 강제하는 셈이다 이는 미래의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가 아니다. 지금의 일상이다. 디바이스라는 '상사'에게 인간이라는 '부하'가 끌려다니는 의사결정일지라도, 그 의사결정이 제대로 작동한다고 느껴지만 '그걸로 좋다'는 정통성이 부여된 것이다. 이렇게 의사결정의 정통성 개념이 바뀌는 과정이 사회 전반에 일어날 것이다. 먼저 개인에, 기업에, 나중엔 국가에도 일어난다.
189쪽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주 나오는 질문은 "고양이나 알고리듬이 과연 책임을 질 수 있는가"이다. 그러나 애초에 '인간 정치인'은 책임을 지고 있나?
지금 자민당 집행부에는 80대 후반의 고령자들이 몰려 있다. 이들이 사회 보장과 의료, 연금, 교육 제도나 정책을 만든다. 수십 년 후의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에 80대 정치인들은 도대체 어떤 책임을 질까? 정책의 결과가 나올 무렵, 이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을터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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