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매각했다지만 전두환 일가의 비자금으로 장남 전재국이 설립한 출판사 시공사. 비자금으로 부동산과 출판권을 사서 급성장한 출판사였지만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를 펴내기 시작했을 때는 출판문화에 기여한 부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해당 주제에 대한 깊은 내용은 물론 올컬러에 고급스러운 종이 질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낮은 가격과 보관이 용이한 문고본 판형까지. 당시 대원사에서도 <빛깔있는 책들> 시리즈로 맞불을 놓긴 했지만 시공사가 압도적이었죠. 지금은 다 어디갔는지 모르겠지만 꽤 모으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간만에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에 들어가는 이 책을 읽어보니 역시 훌륭하네요. 많지 않은 분량으로 1845~1851년 사이의 대기근을 입체적으로 분석한 책입니다. 아일랜드 원서인 <The Irish Famine>이 1995년에 출판되었는데, 국내 출간이 1998년에 되었으니 상당히 빨랐던 점도 이채로웠습니다. 원저자 피터 그레이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이더군요.
12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영국의 식민화로 토착 공동체가 파괴되고, 잉글랜드계 신교도거나 영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재산을 지킨 변절한 지주들과 소작인들 사이의 유대관계 부재, 영국의 곡물 수입국 전환과 나폴레옹 전쟁 종료 후 곡물가격 하락으로 인해 마름을 배제하는 자주들의 직접 통제와 농지를 잘게 쪼개서 보다 단기간 임대하는 관행으로 인한 소작인 지위의 약화, 부수입원이었던 아일랜드의 아마포 가내수공업이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몰락한 점 등이 1845년 이전 아일랜드의 상황이었더군요.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농민들의 생활수준은 조선의 농민들과 별반 다름이 없는 수준이었던 것 같고요.
이미 당시부터 북부의 벨파스트와 그 배후지역은 오트밀을 경작가능했고, 공장 생산방식으로 전환에 성공해서 아일랜드의 나머지 지역과 달리 자유무역 등 영국과 이해관계를 같이 했던 점도 이채로웠습니다.
그러나 아일랜드 농민들은 황무지를 개간해서 열등한 도래작물 취급받던 감자를 재배하고, 수출작물과 목축, 위스키 제조 등으로 지주에게 임대료를 내면서 생계를 유지하며 1700년 200만 명이었던 인구가 1845년에는 850만 명까지 늘어나게 됩니다. 바닷가에서 해초를 채취해서 비료로 쓸 정도로 부지런했으니까요. 감자 외 주곡작물 없이 수출할 상품작물과 목축 위주의 농업으로 인해 850만 명 중 150만명이 농지가 아예 없는 날품팔이었고, 300만 명은 영세한 소자작농 겸 입찰소작인이었다고 합니다.
18세기 중반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에서도 빈민들에 대한 공적부조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지주와 자영농들에게 부과한 구빈세와 재정지원금을 재원으로 운영하는 구빈원, 빈민들을 일용직으로 고용해서 도로, 교량, 상수관, 항만 등을 건설하거나 개량하는 공공공사 발주 등이 이뤄지는 시스템은 작동했는데, 영국 여론의 반대와 증세 부담에 저항한 아일랜드 지주들 때문에 구빈예산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었군요.
1845년에 플랑드르 등 유럽 다른 지역들과 감자마름병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아사자가 속출했었지만, 이듬해인 1846년에는 건조한 여름덕분에 남부 잉글랜드와 유럽대륙은 진균으로 인한 감자마름병을 피할 수 있었다니 기후의 위력은 정말...
퀘이커 교도들을 선두로 해서 영국인들, 해외의 아일랜드인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돈과 식량 원조, 1847년 봄부터 영국정부가 무료식당 운영을 개시하면서 상황이 개선되었는데, 영국정부가 가을부터 무료식당 운영을 중단하고, 원조금이 소진되는 상황에서 총선거 유권자들의 여론을 의식한 원조삭감이 치명적이었더군요. 대기근 시기 영국의 지출은 GDP의 0.1% 정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대략 10년 후에 벌어진 크림전쟁 전비의 1/10 수준이었고요.
이렇게 영국의 지원이 삭감된 상황에서 아일랜드의 영국 부재지주 또는 신교도 지주들은 구빈원 운영을 위한 구빈세 증세에 반발했고, 부유한 북아일랜드 지역 역시 원조세 부과를 거부했으니...게다가 아일랜드의 성직자는 농가에서 생산한 우유, 달걀, 텃밭 채소에까지 십일조를 행사했다고 합니다.
-------------------------
14쪽
18세기 초에 들어섰을 때 전인구의 4분의 3이 넘는 카톨릭교도가 소유한 땅은 전아일랜드의 14%에 지나지 않았다.
16쪽
대부분의 (아일랜드) 시골 빈민들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클라찬' 부락에 살았다. 작은 땅뙈기들이 복잡하게 얽혀 이루어진 그들의 토지는 일정기간마다 재배분되는 런데일(rundale)제도에 묶여 있었다. 땅 한 뼘 가지고 있지 않은 날품팔이 인부는 거의 없었고, 대가족과 지역공동체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협동작업이 빈번했다.
41쪽
1845~1846년의 구제활동은 영국 내의 상당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는데, 비판의 상당 부분이 이데올로기에 기인했으며, 아일랜드 농민의 게으름과 지주의 기회주의를 헐뜯는 진부한 것이었다. 비판자들은 자신들의 적개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식적인 폐해 증거들을 이용했다. 제일 많이 거론된 반대근거는 실업자 구제사업 고용자 선정과 관련된 것이었고, 과연 그 일이 적절하게 분배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67쪽
그들은 지금의 체계가 무너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문제의 원인은 부족한 자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더 이상 세금을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부에서는 지방세가 토지시가의 4분의 1을 넘었고, 광범위한 조세저항에 부딪히고 있었다.
(중략)
지주들은 연수입 4파운드 이하의 소작농에 대해서 구빈세를 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 이들을 기생충처럼 경멸했다. 1846년 이래 지주들이 앞장서서 임대료를 삭감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98쪽
1845년 전까지 약 100만 명이 아일랜드를 떠나 주로 캐나다와 미국으로 향했다. 영국의 공업도시로 진출하는 예도 많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경비가 비싸서 재정적인 도움을 받은 소 수만이 이민을 갈 수 있었다.
이민자의 대다수는 아일랜드의 영어 사용 지역과 상업이 발달한 지역 출신이었다.
103쪽
영국의 공업제품과 미국의 농산품의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지면서 리버풀-뉴욕 항로가 발전하고 있었지만, 가장 싼 배편은 캐나다의 목재선이었다. 한편, 목재를 내려놓은 선주들은 빈 배로 가지 않고 인간화물을 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아주 만족해했다.
(중략)
1847년에 제정된 미국의 승객법이 이민 수송에 엄격한 규제를 가하자 배삯이 1인당 7파운드 이상으로 올랐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더 싸고 규제도 덜한 캐나다 항로를 이용했다. 물론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미국이었다.
(중략)
19세기를 통틀어 미국보다 캐나다에 아일랜드 출신 정착민이 더 많이 분포했고, 1880년대까지는 비프랑스계로서는 아일랜드인이 최대 집단을 이루었다.
110쪽
1851년에는 리버풀 인구 중 5분의 1 이상을 아일랜드 대기근 이민이 차지하게 된다.
118쪽
1861년에는 아일랜드 땅의 5분의 2가 100에이커 이상의 대규모 목초지로 바뀌었다.
(중략)
1845년까지 400만 명이 아일랜드 어를 썼다. 그러나 죽거나 이민을 떠난 사람들이 주로 아일랜드어 사용층이기에, 1851년에는 아일랜드어 사용자수가 반으로 줄어든다. 대기근은 아일랜드어와 가난 또는 후진성을 더욱 강하게 연관시켰고, 아일랜드어를 버릴 것을 더욱 종용했다.
137쪽
"세계 어느 나라에나 극빈자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국민이 다 거지인 나라는 아일랜드 외에는 보지 못했다. 그런 나라의 사회상태를 설명하는 데는 그 참상과 고통을 열거하기만 하면 된다. 빈곤의 역사가 바로 아일랜드의 역사이다." - 귀스타브 드 보몽(1839년)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