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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안인길 역] 아일랜드 일기(1957)

독서일기/유럽소설

by 태즈매니언 2024. 11. 23.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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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아일랜드를 두 번 여행했던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이란 분이 쓴 단편소설+수필집입니다. 197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데 처음 읽어봤네요. 독일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연재했던 글들은 여행 수필에 가깝고, 여행 이후에 쓴 글들은 아일랜드에 대한 단편소설로 읽힙니다.

전체적으로 아일랜드를 관찰하면서 유럽에서도 아일랜드와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문화에서 대척점에 있는 독일사회의 어두운 그늘에 대해 지적하는 성찰적인 글들이 많습니다.

(바이킹들의 침입 이래로 대부분 그러긴 했지만) 유럽으로 명목상 끼워주긴 했지만 서쪽 변경 취급받던, 아일랜드가 가난했던 시절을 살던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깔린 시선덕분에 60년 가까이 전에 나왔지만 불편한 부분은 없었는데 번역때문인지 각주로 달아줬으면 좋았을 배경 지식이 부족해서인지 이해가 잘 안되는 단편들이 꽤 있었습니다.

하인리히 뵐이 생각한 아일랜드에 대한 이해와 감정을 농축해서 담은 건 18개의 글들 중에 첫 번째인 <도착1>이라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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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쪽

아일랜드에는 버려진 집이 대단히 많다. 내키는 대로 두 시간 동안 산책하면 도중에 이런 집들을 수도 없이 만난다. 10년 전, 20년 전 또는 50년 전, 80년 전에 버려진 집들이었다. 비와 바람이 스며들지 않도록 창과 문을 나무판으로 못박아놓은 집들인데, 못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우리 옆집에 살던 할머니도 이 마을이 언제 버려졌는지 모른다고 했다. 할머니가 어린 소녀였던 1880년경에 이미 마을은 버려진 상태였다. 할머니의 여섯 자식 중 둘만 아일랜드에 남았다. 둘은 맨체스터에 살면서 거기서 일한다. 둘은 미국에 있다.

64~65쪽

아일랜드에서 나는 길이 젖소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실제로 젖소들은 아이들이 학교로 가는 것처럼 자유롭게 풀밭으로 간다. 소들이 떼를 지어 길을 점령한다.
(중략)
여기 길들은 대단히 아름답다. 길은 담과 담, 나무와 그리고 관목 울타리로 되어 있다. 아일랜드의 담은 어찌나 긴지 그 돌로 바벨탑을 쌓을 수 있을 정도이다.

91쪽

이곳의 비는 절대적이고, 성대하고, 무서운 것이다. 이곳의 비를 나쁜 날씨라고 말한다면, 그건 틀린 말이다. 마치 이글거리는 태양을 보고 날이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109쪽

토지가 달린 농가 아홉 채가 매물로 나왔다. 하지만 매입자는 하나도 없다. 젊은 아일랜드 남자들은 수도사를 천직으로 생각하고, 어린 소녀들은 수녀를 천직으로 여긴다. 간호사를 구하는 영국 병원들은 유리한 조건을 내건다. 유급 휴가와 1년에 한 번 집에 갈 수 있는 공짜 표를 준다.

122쪽

녹색과 검은 색의 벌거숭이 언덕에서는 해가 좋은 날이면 마치 추수하는 것처럼 이탄 캐기가 벌어진다. 여기서 수세기 동안 내려온 습기로 민둥한 바위와 호수 그리고 녹색의 풀밭 사이에서 자라난 이탄을 수확한다. 이탄은 이 나라가 자연에서 얻는 유일한 보화이다.
(중략)
벽난로의 불은 갖가지 흔적을 모두 삼키니 얼마나 관대한가?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찻잔, 술잔 두세 개, 그리고 벽난로 속에서 타오르는 빨간 불꽃뿐이다. 벽난로 주변에서 집주인이 이따금 까만 이탄덩어리를 새로 올려놓는다.

130쪽

아일랜드에서는 신부가 술집 허가, 법정 폐점시각 확정 및 댄스파티 등에 대해 결정권을 가진다.

140쪽

버스운전사가 조심스럽게 경적을 울린다. 그것도 대단히 조심스럽게. 버스운전사들은 이미 몇 백 명 내지 천 명의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았고, 그들을 열차로 실어 날랐다. 그는 열차가 기다리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별 후가 더 참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

150쪽

전통은 대체로 매우 약하다. 전통이라는 것은 있다고 알게 되는 순간 이미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65쪽

더 나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은 아일랜드의 일상어 중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다. 실제로 나쁜 일이 자주 생기니, 더 나쁜 일은 위로의 말이 된다.
"더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의 쌍둥이 자매도 자주 사용한다.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나는 걱정하지 않을 거야. 이 말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 분도 걱정이 없는 때가 없는 민족으로서는 사용할 근거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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