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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윤]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2024)

독서일기/사회학

by 태즈매니언 2024. 12. 1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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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윤 교수님은 전혀 몰랐던 분인데 학자로서 경력도 화려하시고 쓰신 책과 논문들도 엄청 많네요. 요새 타임라인에서 이 책 이야기가 많이 나와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액화노동'이라는 개념으로 기존 복지국가모델을 구성하는 사회복지체계의 사각지대가 커지고 있음을 지적하시는 1부와 2부는 250페이지가 되지 않는 이 책의 분량상 생생한 불안정노동의 사례들과 연구의 디테일들을 담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논문이 나왔던 시점과 2024년의 시차도 영향을 미쳐서인지 최근에 접해온 플랫폼노동 이야기들과 특별히 다른 결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읽으면서 한국이 유럽 선진국보다 복지국가체계가 뒤떨어지고 예산도 덜 쓰고 있으니 기존 제도의 제약이 덜해서, 노동의 액화로 인한 사회복지 사각지대에 대처하기 위한 제도 전환에는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노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복지정책을 고민하는, 테뉴어를 받고 입지도 다진 교수의 정부정책활동 소회를 담은 3부와 여성 중견 연구자이자 한국사회의 주류의 일원으로 초대받은 상황에서의 복잡한 마음에 대한 고민이 담긴 4부가 좋았습니다. 이런 성찰적인 내용을 담은 솔직한 학자의 에세이가 드물더라구요.

출범 당시 언론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던, 대한민국 정부위원회 중에 평균연령이 가장 젊은 청년기본법에 근거한 '청년정책조정위원회'의 초대부위원장으로 모든 회의에 참석하며 기본계획 작성에 관여하면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청년들의 니즈와 정부위원회의 한계를 경험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왜 학계에서 여성연구자들이 총 연구 생산성(저자당 논문 게재 수)와 논문 영향력(연구의 인용 횟수)에서 평균적으로 떨어지는지에 대해 연간 생산성은 비슷한 수준이나 성별격차가 주로 '경력기간의 차이'와 '중도 탈락률'의 차이 때문이라는 점을 밝혀주신 부분도 좋았고요.

그런데 이 책 내용 중 연구내용을 소개하는 부분의 문체에서 90년대말에서 2000년대 초반에 대학가에서 많이 읽혔던 사회과학서적에서 쓰이는 단어와 표현들이 너무 많아 나머지 부분의 문장과 이물감이 들더군요. 이 점이 에세이로서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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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쪽

한국의 복지지출은 선진국의 평균치에 비해 상당히 낮다. 복지 수준이 낮으면 시장에서 구매를 통해서만 어느 정도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소득이 중요해진다. 자유시간이나 쉼을 확보하는 것보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버는 것이 훨씬 더 큰 효용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이때 구매력은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 수준, 그리고 개인과 가구의 소득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저임금노동자는 한 시간 더 일해도 소득이 필요한 만큼 충분히 늘지 않아서 더 긴 시간 일할 수밖에 없다.

100쪽

최저임금 상승으로 (고용보험 실업금여) 하한액 적용자의 임금 대체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상한액을 좀처럼 변하지 않고 있다. 2020년에는 제도의 본래 설계목표이기도 한 평균임금의 60%만큼을 받는 수급자의 비중이 2.7%밖에 안 되는 기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반면 하한액 적용자는 78.5%나 된다. 같은 자료에서 2020년 기준 상한액 적용자가 받는 실업급여는 실업 전 평균임금의 32.2% 수준에 그친다. 과연 실직 전에 받던 임금의 32.2%의 소득으로 같은 경력의 다른 일자리를 찾거나 재훈련을 받을 수 있을까. 생활수준의 급격한 저하가 충분히 그려진다.

169쪽

한 집단에서는 남성 청년노동자의 불안전성을 밝혀준 의미 있는 연구라는 열렬한 환영과 함께 분석 결과를 지지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꼭 논문으로 완성해 출판하길 바란다는 응원까지 받았다. 한편 다른 집단에서는 "여성청년의 처지는 나아지고 남성청년이 불안정해졌다는 연구 자체를 왜 (여성학자인) 이승윤 교수가 시도하는지 모르겠다"와 같은 매우 부정적인 반응에서부터 나의 분석 능력에 대한 의구심까지 드러냈다. 심지어 한 세미나의 좌장이었던 어떤 연구자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내 발표문을 읽은 토론자가 현재 '반젠더적' 연구 결과를 보고 매우 난처해하고 있으니 발표할 때 분위기를 감안하라는 귀띔을 해주기도 했다. 또다른 한 공간에서는, 이 연구를 발표하면 안티페미니스트로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것이 염려되니 연구를 지속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202쪽

학문의 엄격성이 무뎌지는 것과 비가시화된 사회문제에 대한 연구 동기가 점차 소멸해가는 것은 떼려야 뗄 수 없기에, 주류집단으로의 편입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분석적인 관점을 추구하는 학자로서 우려해야 할 문제이다.
한편, 학자가 주류라 일컬어지는 순간 그에게는 일정한 청중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청중은 정부 정책결정자, 정치인부터 언론인 그리고 대중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다. 담론을 형성하는 데 어느 정도 특권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주류적 위치는 주요한 문제제기를 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지만, 동시에 학자가 객관성을 유지하며 연구에 집중하는 데 교란 작용을 한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집단의 구성원이 믿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연구 결과에 온몸을 던져 주장을 펼칠 수 있을까. 학문의 엄격성을 지키는 데 있어 청중의 기대는 방해물로 작동할 수 있다.

203쪽

실천적 지식인에게는, 그리고 나에게는 어떤 선택지가 있을까. 선택지를 고르는 과정은 주류화의 유용성과 위험성을 명확하게 인지한 상태에서 아슬아슬하게 그 중간 어디쯤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주류화를 통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에 대한 이익, 그리고 빈곤과 불안정노동의 현실 세계에 대한 감각의 손실 사이에서 손익분기점은 어디인가, 주류로서 자원과 권력을 가지고 현실을 변화시켜나가는 영향력과 학자로서의 엄격성에 가해질 손상을 저울질해본다면 어떻게 균형추를 놓아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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