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 전반기를 살다간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들은 워낙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도 인물을 대상으로 한 전기소설들이 호평을 많이 받더군요. 읽으면서 인물에 대한 심리묘사 부분만 덜어내면 빼어난 논픽션의 전범일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 번역본의 제목이 판매에는 더 도움이 되었겠지만, 이화북스에서 예전에 번역했던 <조제프 푸셰 :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이 원제와 내용에 맞는 표현입니다.
조제프 푸셰는 '흑막'의 상징처럼 된 인물이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읽어보니 권력의 향배에 기민하게 반응하면서 승자의 편을 선택했고, 권력에 순응하면서도 무리가 되지 않게 자신의 이익을 취했던데, 프랑스 혁명시기라는 혼란기에 자신의 이념을 여러 차례 갈아치우면서도 권력을 유지해가는 모습은 '정치하는 기계'라고 불릴만 하네요.
<왕좌의 게임> 원작소설에서 사실상 왕좌의 게임판을 만들어내는 모략가 '리틀 핑거' 피터 베일리쉬 경이 푸셰와 비슷한 캐릭터 같습니다. 산사에 집착한 리틀 핑거아 달리 푸셰는 그런 약점도 없어보였고요.
그런데, 저는 그런 정치가가 '나쁜 정치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쁜 정치가는 '권력의지가 없거나 결정을 못내리는 정치가'라고 생각하거든요.
사회생활하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직장이나 커뮤니티활동을 하다보면 정치적인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그 감각이 극단적으로 발달한 조제프 푸셰의 행동들을 통해 정치적인 사람들을 이해하는 계기로 삼아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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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쪽
프랑스 혁명가의 죄과는 피에 취한 것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말에 도취한 것이다. 그들은 다만 국민을 감격시키고 자신들의 급진주의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 위해 피 비린내 나는 은어를 창조하여 끊임없이 배반자와 사형대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거칠고 자극적인 말에 도취된 민중이 얼이 빠져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착각한 "과감한 조치"를 요구하면, 지도자들은 배반자들을 단두대에 걸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반대할 용기도 없었을 뿐더러 단두대에 대한 자신들의 경고가 거짓이라고 책망 받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씻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토해낸 난폭한 말들을 어쩔 수 없이 좇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민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경쟁에서 아무도 뒤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잔혹한 말들의 성찬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203쪽
다만 사소한 차이점이 있다면, 푸셰는 명령에 반드시 순종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타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체포명령이 위임되었을 때는 체포 위험이 있는 당사자에게 미리 경고를 주었다. 만일 그 사람을 꼭 처벌해야 한다면 그것은 황제의 명령에 따른 것이지 자신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이나 친절한 일이면 언제나 자신이 자비나 관용을 베푸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217쪽
탈레랑의 방법이 직관적이라면 푸셰의 그것은 기민함이다. 태만하면서 천재적인 임기응변이 몸에 밴 탈레랑과 수천 개의 눈을 움직여서 판단하는 계산가 푸셰, 역사가 나폴레옹쪽에 가담시킨 이 두 인물이 보여주는 묘한 대조는 어떤 예술가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먼 곳을 잘 보는 눈과 가까운 곳을 잘 보는 눈, 열정과 근면, 세계적인 지식과 세계적인 직관, 이 두 재능을 한 몸에 겸비한 완전한 천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중략)
또, 두 사람이 서로 원한을 품고 증오하는 것이 나폴레옹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증오함으로써 수백 명의 근면한 밀정이 감시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두 사람을 감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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