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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쉬언/김연수] 달리기와 존재하기(1978)

독서일기/에세이(외국)

by 태즈매니언 2025. 3. 6.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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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 유정곤님께서 추천하신 장거리 달리기 운동의 정신적인 의미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원서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인 1978년에 출간되었는데, 소설가 김연수님께서 2003년에 번역해주셨습니다.

몇 년 전부터 러닝이 취미로 각광을 받고 있는데, 이렇게 장거리 달리기의 의미를 정신적인 측면에 집중해서 쓴 책은 못봤던 것 같네요.

조지 쉬언 박사는 44세에 심장병 전문의 일을 접고 취미로 하던 달리기를 전업으로 택해서 미국 전역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수시로 참여하는 러너로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59세에 이 책을 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 61세의 나이로 마라톤을 개인 최고기록인 3시간 1분으로 완주하셨는데, 50대 남성 엘리트 러너(상위 5%)의 완주시간이 3시간 9분 40초라고 하니 엄청난 기록이죠.

 



운동과 놀이를 통한 순수한 몰입과 완벽에의 추구를 통한 세상과 정신의 합일의 추구는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는 자기 책의 메시지를 그대로 실천하신 셈이죠.

저자는 현대사회가 '지식과 훈련'을 강조하고 있지만 각자 자기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며 의미를 추구하는데는 '운동과 놀이'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운동에는 인생이 집약되어 있고, 한 번의 스포츠 게임은 삶의 유한성을 압축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고 강조하는데, 러너스 하이에 대한 서술들이 스토아학파의 행복론에 나오는 '아파테이아(부동심)'과 비슷하면서도 종교적인 측면이 짙어서 러닝종교학 교주의 교시나 교리문답서 같은 느낌도 있긴 합니다.

현대사회가 지식을 과하게 예찬하긴 하지만, 저자가 인용하는 것처럼 '인류에게 가르칠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더로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한 시대에 대여섯 명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다니 지식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으신 건 아닌지. ㅎㅎ

스포츠와 놀이의 중요성을 그래도 강조하는 미국에 사셨으면서도 이런 책을 쓰셨던 저자께서 만약에 (특히 10대들의) 스포츠와 놀이에 대해 적대적인 지금의 한국사회를 보셨다면 얼마나 황당해하셨을까 궁금하네요.

다만, 고령에 체지방률 5.3%의 러너로 온갖 의학적 질병들을 달고 계속 무리하게 보다 완벽한 러닝을 추구했어야 하는지, 언뜻 불가능해보이고 고통스러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고독한 노력들을 지속해야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책을 덮고서 저자의 핵심 메시지를 머리속에서 정리하다보니 떠오르는 게 영화 <족구왕>의 대사네요.
"족구가 대체 너한테 뭔데?"
"재밌잖아요"
그리고 발뮤다 창업자 '테라오 겐'의 지극히 고통스럽지만 포기할 수 없는 '완벽함의 추구'에 관한 메시지와도 비슷하게 느껴졌고요.

배우의 영화, 목수의 가구처럼 객관적인 실력이나 기록, 승패와는 상관없이 육체적 기예와 장인의 덕성을 갖춘 프로젝트라면 무엇이든지 그 직업인의 인생관을 압축해서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꼭 달리기일 필요는 없지만, 저도 해보니 달리기는 여러모로 매력이 많은 운동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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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쪽

금욕주의자는 괴짜 은둔자가 아니다. 그는 최상의 상태, 최상의 법칙, 최상의 삶을 찾으려는 사람이다. 금욕주의자는 성자와 철학자뿐만 아니다. 역도 선수, 축구 선수, 장거리달리기 선수 모두가 금욕주의자다.

114쪽

오직 놀 때만 세상과 평화를 함께 얻을 수 있다. 놀 때,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동시에 대단히 하찮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 우리는 뭔가를 성취하려는 마음이 중요한 동시에 하찮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때 놀이는 우리 존재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된다.
(중략)
참된 가치에는 육체적인 우아함, 심리적인 편안함, 분열되지 않은 자신의 모습 등이 들어간다. 거기에는 자신은 물론 자연과 하나가 됐다는 느낌이 들 때 생기는 절정의 경험이 있다.

217쪽

둘째 발가락이 첫째 발가락보다 긴 발을 모턴발(Morton's foot/toe)이라고 하는데, 이는 발의 모양과 관련해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선천적 결함으로 많이 움직이면 통증이 생긴다.

279쪽

언덕은 러너를 시험하는 좋은 잣대다. 상당한 경사면을 지닌 긴 언덕을 달려 보면 어떤 러너가 과연 자기 말처럼 잘 뛰는지 아닌지 금방 판단할 수 있다. 특히 경기 종반에 그런 언덕이 나온다면 확실하다.

286쪽

내 최고 기록은 이처럼 앞장서서 달리는 선수를 따라가면서 세웠다. 힘든 일은 그 선수가 다 했다. 그 선수가 바람을 맞으며 나를 잡아끌었다. 그 선수가 나를 위해 정확한 속도를 유지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따라갔다. 나는 달리기 속으로 빠져들어 달리기와 하나가 됐다. 나는 무엇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몸이 저절로 최고의 기록을 낸 것이다.

320쪽

운동을 통해 삶은 몇 시간으로 압축된다.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2에이커 정도의 운동장에서 느낄 수 있다. 뉴욕의 공원을 지나는 6마일 정도의 길 위에서 한 인간은 고통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운동은 죄인이 성자로 바뀔 수 있고 평범한 사람이 영웅으로 다시 살 수 있는 무대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서 하나가 된다. 이상한 일이지만 운동을 통해 우리는 이 세계와 하나가 되는 최상의 경험을, 그 모든 불화를 넘어서 마침내 자신의 숨겨진 모든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최상의 경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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