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읽은 소설 중에서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가 떠오르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 소설이 최고다. 2009년에 나온 책을 이제야 봤네.
아래 표지의 그림은 1656년 스페인의 벨라스케스라는 화가가 그린 <시녀들>이라는 그림이란다. 아래의 책 표지에서 도드라지게 처리된 땅딸막하고 못생긴 여자는 왜소증에 걸린 독일인 시녀 '마리아 바르볼라'라고 하고. 이 책의 제목은 벨라스케스가 아래 그림의 주인공인 왕녀 '마르게리타 테레사'를 위해 작곡한 곡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을 빌려왔다.
라벨과 달리 '마르게리타 테레사'가 아닌 어디에나 있을 '마리아 바르볼라'에 대한 감동으로 만든 예술작품이 바로 이 소설이다.
이 소설의 결말을 두고 다양한 해석들이 있는데 나는 두 가지 엔딩 중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느꼈다. 어쨌거나 '아니에너스'는 '아니우스'를 만나 프로메테우스의 심장처럼 매순간 사람들의 잔인한 시선과 말들로 마구 찢긴 생살을 아물고 난 흉터로 바꿀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씁쓸하지만 두 가지 결말 모두에서 흉터를 가진 '아니에너스'가 평범하게 살 수 있었던 나라는 한국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인상깊었고.
흑색의 활자 중간에 파란색과 빨간 색 대사가 도드라지는 컬러의 사용, 큰따옴표를 사용하지 않고 대사를 서술 속에 묻어버리는 방식과 가끔씩 문장을 문법대로 써내려가지 않고 시처럼 가로로 엿가락처럼 늘이거나 세로로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뜨리는 박민규의 글쓰는 방식도 신선했다.
시간을 내셔서 꼭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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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쪽
이것은 너무나 불공평한 시합이다. 첫눈에 누군가의 노예가 되고, 첫인상으로 대부분의 시합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외모에 관한 한, 그리고 누구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지킬 수 없다. 선빵을 날리는 인간은 태어날 때 정해져 있고, 그 외의 인간에겐 기회가 없다. 어떤 비겁한 싸움보다도 이것은 불공평하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140쪽
이전에도 여러 번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까... 즉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저 애에게 가서 말 걸기..그리고 이긴 남자애들이 어딘가 숨어서 배를 잡고 웃는 거예요. 수군거리는 주변의 그 분위기를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런 일을 겪을 땐 언제나 못 박힌 듯 몸이 얼어붙었으니까... 사람의 웃음이..창처럼 사람의 배를 찌를 수 있다는 걸 믿으세요?
174쪽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민주주의 다수결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
185쪽
여자든 남자든 그런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와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을 가진 전선과 같은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거지.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불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또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가수니, 배우니 하는 여자들이 아름다운 건 실은 외모 때문이 아니야.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주기 때문이지. 너무 많은 전기가 들어오고, 때문에 터무니없이 밝은 빛을 발하게 되는 거야.
(중략)
인간은 참 우매해. 그 빛이 실은 자신에게 비롯되어었다는 걸 모르니까. 하나의 전구를 터질 듯 밝히면 세상이 밝아진다고 생각하지. 실은 골고루 무수한 전구를 밝혀야만 세상이 밝아진다는걸 몰라.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던져주고 자신은 줄곧 어둠 속에 묻혀 있지. 어둠 속에서 그들을 부러워하고... 또 자신의 주변은 어두우니까...그들에게 몰표를 던져. 가난한 이들이 도리어 독재 정권에게 표를 주는 것도, 아니다 싶은 인간들이 스크린 속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헌납하는 것도 모두가 그 때문이야. 자신의 빛을...그리고 서로의 빛을
200쪽
그럴 듯한 인생이 되려 애쓰는 것도 결국 이와 비슷한 풍경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이왕 태어났는데 저건 한번 타봐야겠지, 여기까지 살았는데... 저 정도는 해봐야겠지, 그리고 긴긴 줄을 늘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삶이 고된 이유는... 어쩌면 유원지의 하루가 고된 이유와 비슷한 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었다.
273쪽
그리고... 저 같은 여자가 있습니다. 아무리 마취를 해도 고통을 이길 수 없는... 결국 어떤 방법도 찾을 수 없는 여자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래 전에... 마음 속에서 스스로의 얼굴을 도려낸 여자입니다. 이젠 어쩔 수가 없구나... 마음의 단두대에 올라 스스로를 절단한 것입니다. 논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피... 홍건히 세상을 적시던 마음의 출혈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발밑을 뒹구는 저 얼굴을 이제 누가 찌르고 찬다 해도 아프지 않을 거야... 그렇게 봉합을 끝내고 몸통만 남은 마음으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택한 진통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런 여자를... 도대체 누가 사랑해 줄 수 있겠어요.
282쪽
아무리 형편없는얼굴이라 해도 화장을 마치고 집을 나서는 여자의 마음은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끝끝내... 자신의 '어쩔 수 없는' 모든 부분을 달의 뒷면 같은 곳에 묻어두는 것입니다. 늦은 밤 화장을 지우는 여자의 마음은...그래서 달처럼 먼 곳에 머무르다 지상으로 돌아온 우주인과 같은 것입니다.
286쪽
저는 언제나 '진행형'의 상처를 안고 사는 여자였습니다. 끝없이 덧나고 영원히 이어질...그런 상처를 안고 사는 여자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더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그런, 흉터를 가진 여자일 뿐이에요.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차이인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사람의 여자에게 얼마나 큰 기적인지도 짐작할 수 없을 겁니다. 말하자면 제게... 당신은 그런 남자였습니다.
296쪽
사용할 일이 전혀 업는 지식을 왜 배우는 걸까. 이를테면 f(x+y)=f(x)+f(y)를 가르치면서도 왜, 정작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왕조의 쇠퇴와 몰락을 줄줄이 외게 하면서도 왜, 이별을 겪거나 극복한 개인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 않는가. 지층의 구조를 놓고 수십 조항의 문제를 제출하면서도 왜,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교육은 시키지 않는 것인가. 아메바와 플랑크톤의 세포 구조를 떠들면서도 왜, 고통의 구조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이 없는가.
300쪽
여름이었을 것이다. 샤워를 하다 문득, 이별이 인간을 힘들게 하는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고통보다도, 잠시나마 느껴본 삶의 느낌... 생활이 아닌 그 느낌... 비로소 살아 있다는 그 느낌과 헤어진 사실이 실은 괴로운 게 아닐까... 생각이 든 것이었다.
생활
생활
생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영영 이어질 생활과... 어느 순간 배수구 속으로 맴돌며 사라질 허무한 삶.. 아니, 삶이 아닌... 생활...
310쪽
고대의 노예들에겐 노동이 전부였다.
하지만 현대의 노예들은 쇼핑까지 해야 한다.
누군가의 외모를 폄하하는 순간, 그 자신도 더 힘든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예쁜가? 그렇게 예뻐질 자신이...있는 걸까? 누구가의 학력을 무시하는 순간, 무시한 자의 자녀에게도 더 높은 학력을 요구하는 세상이 주어진다. 아, 그렇겠지... 당신을 닮아, 당신의 아들딸도 공부가 즐겁겠지 나는 생각했었다. 사는 게 별건가 하는 순간 삶은 사라지는 것이고, 다들 이렇게 살잖아 하는 순간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할 세상이 펼쳐진다. 노예란 누구인가? 무언가에 붙들려 평생을 일하고 일해야 하는 인간이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영웅을 필요로 한다. 잘 좀 살아, 피를 불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중략) 피리를 불어주세요, 더 멋지게... 피리를 불어주세요, 더 예쁘게.. 쫓고 쫓기는 경쟁은 그 뒤에서 시작된다. 서로를 밀고 서로를 짓밟는 경쟁도 그 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하멜른의 어떤 쥐들도 피리 부는 자를 앞서 뛰진 못했지.
324쪽
그러니까 스타는 따로 있는 거야. 헬기를 타고 오고 그저 단상에 앉아만 있어도 다들 사열한 채 스타는 좋겠다... 부러워하는 거지. 그러니까 화가 나더라고. 스타에 오를 리도 없는데 일병 7호봉이 되었다는 둥, 상병을 달았다는 둥... 군대에서 2개월 차이면 하늘과 땅 차이라는 둥 서로를 비교하고 위치를 확인하는 이 생활이 말이야. 어차피 자갈이나 닦으면서 내가 더 잘 닦는다는 둥, 누가 더 빨리 끝냈다는 둥... 그래서 이제 곧 병장을 다니 어쩌니... 사단장이 볼 땐 그런게 진급으로 보이기나 할까? 말하자면 그런 거지. 물론 연설이야 그렇게 하겠지. 수고가 많다는 둥, 장병 여러분이 자랑스럽다는 둥...
341쪽
정성껓 봉한 편지를 품고 걸어가던 그 길을... 그 길의 끝에 서 있던 빨간 우체통의 작은 틈새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까스로, 마치 신체의 일부를 떼어낸 느낌으로 나는 편지를 밀어 넣었고... 툭, 그 느낌에 비해 결코 가볍다고도 무겁다고도 말할 수 없는 통 속의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종이의 무게가 아니라 마음의 무게가 내는 소리였고... 나는 비로소 스스로의 모든 걸 운명에 맡긴 기분이었다. 기억하는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역시 다음과 같이 짧고, 간결한 두 줄의 문장이었다. 오로지 진실인 이유로 평범할 수밖에 없는 문장들이었다.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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