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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휘트니 외/이경식 역] 미국의 역사(2004)

독서일기/미국

by 태즈매니언 2015. 2. 1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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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어린시절 읽었던 <이야기 미국사> 이후로 처음 읽는 미국 통사인데 비매품이고 발행처가 무려 미국 국무부다. 이 책이 과연 우리나라 국정교과서와 같은 위상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책 자체는 좋다.(아직 책의 절반 밖에 못 읽은 상태) 


미국 남부의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던 백인들이 왜 남부동맹을 위해 총을 들었는지(195~196쪽)와 1857년의 드레드 스콧 vs 샌포드 판례(207~208)이 어떻게 남북전쟁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는지,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 중산층들의 미국국적 취득을 위한 원정출산에 애용되고 있는 미국 헌법 수정 제14조 제1항이 남북전쟁의 산물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미연방헌법 수정 제14조 제1항] 제1절,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귀화한 자 및 그 사법권에 속하게 된 사람 모두가 미국 시민이며 사는 주 시민이다. 어떤 주도 미국 시민의 특권 또는 면제 권한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거나 강제해서는 안된다. 또한 어떤 주에도 법의 적정 절차없이 개인의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게다가 그 사법권 범위에서 개인에 대한 법의 동등한 보호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Part 2. 

뉴욕여행 때문에 집어들었던 <미국의 역사(An Outline of American History)>의 나머지 반절을 다 읽었다. <교통개발연구원> 이라는 옛직장명이 주는 오래된 느낌처럼 주한미대사관이 2004년에 펴내서 배부한 책이라 업데이트가 안된 어용서적일 것 같은 첫인상과 달리 의외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자국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었다.


고전적인 웨스턴 영화에 나타나는 철도자본가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와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에서 묘사한 농민의 참상이 왜 1930년대 중반에 유독 심했는지, 막연하게 소비자운동을 주창한 변호사 출신 시민운동가로 알고 있었던 랄프 네이더가 자동차 안전입법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도 소소한 수확


적어도 한 세대가 지나면 그 이전 세대의 공과를 냉철하게 평가할 수 있는 미국의 저력이 부럽다. 증오와 선동으로 점철된 진영논리가 지배하는 나라의 국민이라서 더 부러운 부분이었다. 식민과 분단, 전쟁이라는 안좋은 환경이었던 나라와 풍족한 자원과 양대양으로 인한 격리가 주는 보호 속의 안온환 환경의 나라를 같이 놓고 비교해서는 안되겠지만.

기회가 되면 린든 존슨 대통령에 대한 책을 찾아서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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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쪽

식민지에서 강력한 귀족 계급이나 상류 사회가 등장할 수 없었던 데는, 누구든 변방으로 나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해안 지대의 지배적인 인물들도 오지로 떠나려는 이주자들을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정책을 보다 완화해야만 했고, 또 토지 무상 불하나 종교 자유와 같은 문제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쪽

1647년에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는 50가구 이상 사는 마을에서는 반드시 문법학교(대학교 입학을 준비하는 라틴어 학교)를 지어야 한다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 직후, 로드아일랜드를 제외한 뉴잉글랜드의 다른 식민지에서도 모두 매사추세츠 만의 사례를 따라 같은 법률을 제정했다. 

78쪽

영국 정부는 식민지 사람들이 새로운 영토로 급격하게 이주해 들어가면 기존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과 전쟁이 일어날 게 뻔했기 때문에 이주를 천천히 점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주를 제한하는 건 기존에 살고 있던 이주자들에 대한 국왕의 권위와 통제를 강화하는 길이기도 했다. 1763년의 포고령은 앨러게이니 산맥, 플로리다, 미시시피 강, 그리고 퀘벡 사이의 영토를 토착 인디언이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93쪽

영국으로서는 최소한 남부 지역의 식민지들은 노예제도 때문에라도 영국 입장에 서리라 기대했다. 남부 지역 식민지의 많은 사람들은 모국인 영국에 대항해서 전쟁을 벌이다가는 대농장의 노예들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실제로 1775년 11월에 버지니아의 총독이었던 던모어가 영국을 위해 싸우는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던모어의 이 제안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영국 편으로 남았을 수많은 버지니아 인들을 독립을 주장하는 편에 서게 만들었다. 

159쪽

1812년 전쟁은 어떻게 보면 2차 독립전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가지 미국은 독립된 국가로서 다른 국가들과 평등하게 어깨를 겨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195쪽

남부 사람들 가운데 극히 일부 계층만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1860년에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던 주를 통틀어서, 20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대농장주라고 할 때 이들 숫자는 총 46,274명이었다. 노예의 반 이상이 대농장에서 일했다. 40헥타르 미만의 땅을 경작하는 사람이 70퍼센트나 되던 자작농 가운데 일부 만이 노예를 소유했을 뿐, 대부분의 자작농은 노예가 없었다. 이 '가난한 백인들'은 남부 사회의 가장 하층을 형성했고, 당연히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다. 노예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대농장주의 이해관계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다. 하지만 자작농과 가난한 백인들까지 노예제도를 찬성했던 데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들은 사실 흑인 노예가 해방되면 결국 자기들과 토지를 놓고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게다가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노예라는 존재가 있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상층을 형성할 수 있었지만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순간 그런 우월적인 지위를 잃게 될 것이 자명했다. 

207쪽

스코트는 약 20년 전에 미주리에 살던 노예였는데 주인을 따라 일리노이로 이주했다. 한데 이 지역에서는 북서부 법령에 의해 노예제도가 금지되어 있었다. 스코트는 노예제도가 금지된 땅에 살고 있으니 자신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남부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던 대법원에서는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스코트는 시민이 아니라서 소송을 제기할 자격에 결격 사유가 있으며, 비록 그가 일리노이에 살고 있긴 하지만 주소지는 노예제도가 허용된 미주리이기 때문에 일리노이의 법은 그에게 효력이 없고, 따라서 노예 소유주는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권리를 연방의 어떤 영토에서도 보장받을 수 있으며, 연방 의회는 노예제도의 확산을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224쪽

수정헌법은 1868년에 비준되었다. 제15차 수정헌법은 다음해에 의회를 통과해서 1870년에 비준되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시민의 투표권은 인종이나 피부색, 또는 과거 노예 신분이었다는 이유로 미국 정부나 주 정부로부터 거부되거나 축소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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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쪽

이주민들이 서쪽으로 멀리 진출할수록 이들이 생산한 농산물은 그만큼 더 많이 철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농부들은 비싼 값에 생필품을 사서 써야 했다. 동부의 공업 부문 종사자들을 지지 기반으로 삼던 의회가 오랫동안 보호관세 정책을 지켜온 결과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중서부와 서부의 농민들은 부동산을 은행에 저당 잡히고 점차 더 많은 빚을 끌어다 써야 했다.


323쪽

미국 농민들은, 미국의 높은 수입 관세 때문에 피해를 입은 나라들이 보복 관세를 부과하는 바람에 그곳엔 농산물을 수출할 수 없었다. 세계 시장의 문은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1930년대 경기 침체가 시작될 무렵에 농업 부문은 이미 허약할 대로 허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336쪽

1935년부터 1938년까지 거센 바람과 모래폭풍이 '황진지대'로 알려진 남부의 대평원 지대를 강타했다. 농작물과 자동차 그리고 기계가 파괴되었고, 사람들과 동물들이 다쳤다. 대략 80만명이나 되는 이주 농민들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아칸소와 텍사스,미주리, 오클라호마를 떠났다. 이들은 대부분 약속의 땅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중략)
정부는 1935년 토지개량사업이라는 형태로 지원에 나섰다. 반복적인 경작으로 토양의 질이 떨어져 있었고 게다가 바닷바람까지 토양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 한몫 했는데, 이 토양의 질을 높이는 방법을 농민들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401쪽

존슨 행정부는 또한 승객 및 화물 수송의 안전에 관해서도 특별히 강조하고 조치를 취했다. 여기에는 랄프 네이더라는 젊은 변호사의 노력도 컸다. 네이더는 <아무리 천천히 달려도 위험하다.: 위험한 미국 자동차>라는 책에서, 수많은 차들이 저속에서 발생한 사고에서도 승객을 치명적인 부상이나 죽음으로 몰고 간다며, 자동차 회사들이 차의 맵시를 위해서 승객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위험한 몇몇 차종을 적시하기도 했다. 1966년 9월 , 존슨은 2개의 수송법안에 서명했다. 하나는 주 정부에 수송안전을 위한 사업기금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동차와 타이어를 대상으로 하는 연방 안전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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