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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제4권(2014)

독서일기/일본

by 태즈매니언 2015. 5. 18.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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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일본에 푹 빠져서 재미있게 읽고 있는 시리즈인데 3권을 건너뛰고 4권을 먼저 보게 되었다. 이달 초에 다녀왔던 교토의 명소를 다루고 있어서 인상깊게 읽은 책. 직접 눈으로 보고, 걷고 나서 책을 보니 1~2권보다 몰두해서 읽게 되더라


이번 교토여행을 통해서 사원 '건축'과 정원을 만드는 '작정(조경)'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작품인지 오롯히 느낄 수 있었다. 미술관 벽을 통해 바라보는 그림처럼 2차원 평면에서도 가끔 감동을 느끼긴 했지만 차원이 달랐다.


머리 속의 지식은 별로 없었지만 둔감한 내 눈으로도 세심히 관리되고 유지되어온 삼차원의 공간을 수백년의 시간 동안 쌓인 세월의 켜를 음미하며 바라보는 4차원의 예술 감상은 강렬한 체험이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에 나오는 소쇄원을 실제로 거닐었을 때의 느낌도 이랬던 것 같다.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기에 유홍준씨의 시리즈가 큰 반향을 일으켰을테고.


이 책은 아름다운 천을 짜낸 베틀의 원리, 실오라기 가닥을 모아 꼬아놓은 방법, 그리고 문양의 패턴을 분석해서 내 눈이 느낀 감동이 무엇때문인지 분석해주는 내용이기에 아름다운 천을 보는 감동을 배가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극의를 추구한 이들이 들인 공력과 그들의 디테일한 심미안의 수준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메신저를 통해 옛 사람과 온전하게 감정을 교류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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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쪽

500여 년 전 이 정원을 무슨 의도로 이렇게 조영한 것인가. 용안사(료안지) 석정은 관조의 정원에서 더 나아가 선(zen) 자체를 정원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공(sunya), 비어 있다는 것. 불변, 변하지 않는다는 것. 지, 머물러 있다는 것. 관,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명상, 고요히 마음을 성찰하는 것. 그런 선(zen)의 의의를 돌과 백사로 나타낸 것이다.

정원이 '선'의 이름으로 나타난 것인데 현대적 조형 개념으로 말하자면 추상미술이기도 하고 설치미술이기도 하다.


204쪽

양족이 모두 동백나무 옹벽이지만 아래쪽을 보면 왼쪽은 돌담 위에 대나무 울타리를 둘렀고 오른쪽은 돌담 위가 동백과 질감이 비슷한 치자나무 생울타리로 되어 있는데, 그 사이로 난 가벼운 공간을 통해 바깥 쪽의 울창한 대밭이 엇비치게 했다. 그 절묘한 구성과 이를 유지하는 공력을 생각하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중략)

은각사(긴카쿠지) 참도를 이처럼 정성을 다해 조성한 데에는 깊은 뜻이 있다. 본래 절집의 진입로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의미한다. 거창하게 말해서 세속에서 성역으로 들어가는 전환점이다. 이제 참도를 지나면 곧바로 은각사 정원이 한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 전에 참배객들이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게 하는 배려이다.


254쪽

일본 다도 뿐만 아니라 일본미의 중요한 본질 중 하나인 '와비'는 한적함 또는 부족함을, '사비'는 쓸쓸하면서 고담한 것을 말하는데 그 뉘앙스가 매우 복합적이어서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들다. 게다가 와비와 사비의 차이를 설명하기는 더욱 어렵다. 꽉 짜인 완벽함이 아니라 부족한 듯 여백이 있고, 아름다움을 아직 다하지 않은 감추어진 그 무엇이 있는 것을 말한다.


397쪽

그 중에서도 이 거리에 있는 '도판 명화의 정원'(1994)이라는 아주 이색적인 옥외 전시장은 큰 자랑이 될 만했다. 이 미술관은 1990년 오사카에서 개최된 국제꽃박람회 때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파빌리온 '명화의 정원'에 전시되었던 세계 명화의 세라믹 복제품을 옮겨오면서 작품 수를 늘리고 안도가 여기에 맞추어 새로 설계한 것이다.


401쪽

내가 문화재청장을 지낼 때의 얘기다. 청장 4년째 되던 해 연두 기자간담회에서 '문화재청장을 3년 넘게 지내면서 줄기차게 갖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때 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진짜 고민스러운 것은 100년 뒤 지정될 국보나 보물이 이 시대에 생산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나는 일본도 과연 이런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묻고 싶어진 것이다.


422쪽

임진 정유란 전체의 사상자 숫자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통계가 없다. 그 대신 학자들이 추산하는 방법이 따로 있다. 일본에서 조선에 침략한 병력이 약 30만 명으로 이 중 65%에 해당하는 약 20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럴 경우 피해국의 사상자는 약 10배로 보는 것이 보통이니 약 200만 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당시 조선 인구를 약 1천만 명으로 보면 전 국민의 5분의 1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사람은 약 1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손승철, <조선통신사, 일본과 통하다> 동아시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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