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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2014)

독서일기/일본

by 태즈매니언 2016. 12. 15.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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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께서 추천하신 책인데 오래 기억만 하고 있다가 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세종도서라고 직장 도서실에 기부해준걸 얼른 빌려와서 읽었습니다. 과연 추천받을만한 책이군요.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서 가장 궁금해하는 내용에 대해 답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일본사를 워낙 날림으로 읽고 공부를 안해서 요시나가 후미의 <오오쿠>에서 봤던 로주 등 오오쿠에서 일하는 쇼군의 수족들과 번의 운영체제 등을 접했던게 이 책을 읽는데 꽤 도움을 줬습니다.

저자 박훈 교수님이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주로 개항기 일본의 대외인식과 정치사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리야마 본진의 신상목 사장님께서 월간조선에 연재하시는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경제사와 사회문화사에 관한 글들과 같이 묶어서 보시면 도쿠가와 막...부말부터 일본의 개항기에 전체적인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1장 <도쿠가와 체제의 구조와 특징>이 처음부터 깊은 인상을 주더군요. 많지 않은 분량으로 도쿠가와 막부체제의 핵심을 쉽게 설명해주시네요. 저는 사무라이들이 다이묘가 거주하는 조카마치(성하촌)에 거주하는 도시민으로 봉록만을 받을 뿐 토지소유권도 없고 조선의 양반이나 중국 신사층처럼 향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것도 몰랐고, 사무라이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7%가량이나 되는지도 처음 알았습니다. 서리계층과 비슷한 지위의 하급사무라이들이 200년의 평화시기 동안 신분 상승의 기회가 막혀있었다니.

18세기에 비단, 차, 도자기의 국내생산까지 성공해서 굳이 은을 유출하는 대외무역을 할 필요가 없고 에도의 인구는 당시 세계 최대인 100만,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이 필요한 물건을 제공했던 조닌(상인)들이 형성한 200여개의 조카마치가 있는 도시화율이 상당한 전근대의 평화로운 자급자족 국가가 일본이었군요.

나카사키의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서 자카르타발 풍설서를 통해 당시 세계의 정세를 상세하게 입수했고, 출판문화가 발전하여 재야의 식자층들도 전국7웅을 빗대어 러시아,오스만튀르크, 무굴제국, 유럽, 청, 일본이 대치한 세계의 구도를 인식하고 나름의 방책들을 쏟아냈던 것들을 읽으니 동시대 우리나라와는 차원이 다르더군요.

심지어 요시다 쇼인은 막부의 해금정책을 한탄하면서 "하물며 내가 평생 뛰어다니더라도 동서 경도 30도, 남북 위도 20도의 바깥을 나가지 못함에랴."라고 한탄했다고 하는데 할 말이 없더라구요. 지식인들이 이정도로 세계정세에 밝았으니 1848년 아편전쟁의 패배에서 실제로 패했던 청나라보다 더 강한 위기의식을 가질만 했네요.(심지어 도쿠가와 막부는 미국이 곧 함대를 파견하여 개항을 요구할 것이고, 함대 사령관의 이름이 페리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니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한 후 해밀턴 아일랜드라고 이름붙이고 주둔한 사실은 커녕 거문도가 도대체 어디 붙어있는 섬인지 파악도 못했던 우리네 조상님들을 생각하면 한숨이...)

재조지은 뽕을 맞은 덕에 청나라가 발원지인 만주를 봉금한 이래로 쓰시마 해적들 수준말고 나라의 존망을 좌우할 위기가 닥치면 조공책봉 체계에 따라 중국에 기대면 되었던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13세기 몽골군 외에는 외부 침략을 받을 일이 없었죠. 고립국가여서 안보를 의존할 주변국도 없었고요.(우리나라가 도와줄 의사도 능력도 없었지만 일본도 전혀 기대도 안했더군요.)

전근대의 항해술로 도하가 쉽지 않았던 바다(심지어 반절 이상은 망망대해 태평양)로 보호되어왔던 나라에 살았던 일본인들이 아편전쟁의 통해서 서양의 발달된 항해술과 함포의 위력을 전해듣고 얼마나 충격받았는지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텐진은 그저 관문일 뿐이었고 내륙 수운으로도 식량 조달이 가능했던 베이징이나, 비슷하게 강화도가 쑥대밭이 되더라도 구형 불랑기포로 놓으면 한강 양쪽에서 양이선을 공격할 수 있었고 한강의 흘수선도 낮고 모래톱때문에 자칫하면 대동강의 제너럴 셔먼호처럼 좌초될 수 있어서 수도에 대한 직접적인 무력의 투사가 어려웠던 조선의 경우와 달랐더군요.

당시 일본의 수도인 에도는 지금의 도쿄만 깊숙하게 위치해 있는 인구 100만의 도시였고, 그 인구들은 연안 선박이 조달하는 식량과 물자들로 생활하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무장한 이양선들이 우라가와 훗쓰 사이를 봉쇄하면 에도가 당장 혼란에 빠지고, 바로 상륙도 가능한 상황이었으니. 실제로 1853년에 페리 제독도 우라가에서 무력시위를 벌였고요.(도쿠가와 막부의 금제 중 하나가 번들의 해군 육성을 막기 위해 쌀 500석 이상을 실을 수 있는 선박 제조를 못하게 하는 것이어서 군함이 없었으니.)

저는 막말의 양이론자들을 우리나라 최익현과 같은 쇄국론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개국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시기상조라고만 봤을 뿐이더군요. 부럽게도 막부말의 로주 아베 마사히로가 15년 동안 리더쉽을 발휘하며 서양 사정에 밝은 인재들을 발탁해왔다는 점에서 무능한 고종과 민자영 척족일파들과 비교하면서 한 번 더 한숨을.

종가인 쇼군가와 작은 집 격인 고산케라는 방계의 존재. 쇼군과 가까운 집안이고 참근교대도 하지 않고 일년 내내 에도에 머무르며 상징적으로 부쇼군의 권위를 인정받았으나 막부의 주축으로부터는 방계의 방계 격으로 폄하받고 견제당했던 '내부 균열자' 미토 번의 존재.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중소규모 후다이번 출신인 로주의 정치적 한계에 대한 분석 등도 전혀 몰랐던 내용이라 재미있더군요.

제4장 <유학의 확산과 '사대부적 정치 문화'의 형성>은 이 책의 첫 부분에서 언급되었을 때는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했었는데 여기까지 읽어온 내용, 그리고 저자가 자신이 직접 읽었던 자료들을 제시하며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들을 보니 결국 납득이 되더라구요. (원래부터 아는게 없으니 수긍하는게 당연하기도)

무엇보다 도쿠가와 막부의 엄격한 질서가, 유학을 배우는 기회가 제공한 인적 네트워크와 공론에 대한 관념을 통해 서리 격이었던 하급 사무라이들을 조선의 사대부처럼 정치 열풍으로 이끌었고, 그들이 중국이나 조선과 달리 향촌사회 거주자가 아니라 교류가 손쉬운 도시주민이었다는 점이 막말 정치격동의 핵심이었다는 분석이 탁월했습니다. 그 외에 막부말 유학이 퍼지는 모습들도 다른 책에서 접해보지 못한 내용들이었고요.

저자의 분석처럼 막부의 대정위임론과 최후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에 이 하급 사무라이들이 공부한 유학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제가 이런 결론에 동의하게 될 줄은 읽기 전엔 상상도 못했는데...

예전에 한명기 교수님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를 읽었을 때처럼 이런 학자가 되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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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쪽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필자는 유럽 근대의 성취와 그 획기적 의으를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필자는 유럽 근대가 그 이전의 어떤 시기보다도 획기적인 변화를 인류사에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중략)
그러나 근대의 획기적 의의를 인정하는 것과,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사를 근대화라는 가치 기준 하에서 연구하는 방법론에 찬성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225쪽

필자가 메이지 유신을 공부하기 시작하던 1990년대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 후 한국의 눈부신 발전으로 '근대화'도 '일본 모델'도 매력이 떨어져 갔다. 그러나 이것은 거꾸로 우리가 메이지 유신을 객관적으로, 또 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이 글이 그런 논의의 작은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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