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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남] 구리와 사무라이(2007)

독서일기/일본

by 태즈매니언 2015. 9. 22.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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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고려대 경제학과 모교수의 발언으로 당사자 이름만 바뀐 것 같은 친숙한 내용의 기사들이 많더라. 몇몇 발언의 수위는 내가 쉴드 쳐줄 수위는 아니지만 강의내용 중 필요 이상으로 쎄게 발언하게 된 이유 중 경제학을 전공한 사회경제학자로서의 국사학계의 사회경제사 연구자들에 대한 억눌린 감정이 있지 않을까 싶다.

 

1970년대 김용섭 교수를 필두로한 국사학계의 사회경제사 연구자들이 제기한 광작을 통한 경영형 부농을 중심으로 하는 임노동자의 출현과 소위 자본주의 맹아론은내가 배우던 시절 한국사 교과서에서 중점적으로 강조되던 내용이었다. 구분하기 쉽지 않은 '여각', '객주', '도고' 이런 단어들이 시험이 나올거 같아서 외워야 했고.

 

그런데 지금 낙성대 연구소 멤버인 이영훈 교수 등 경제학계의 사회경제사 연구자들이 아날학파식으로 시계열 분석을 통해서 정치하게 양안이나 궁방전 자료등을 분석한 결과는 직접 농법을 개선하며 농사일에 뛰어드는 경영형 부농의 대두는 보기 힘들고, 한정된 토지에서 촘촘하게 이뤄지는 집약농법과 대지주-가족 중심의 영세소작농 구조의 소농사회라고 분석했다. 일본의 사회경제사 학자들도 이영훈 교수와 유사한 입장이 많고.

 

그냥 학문적인 토론으로 진행되면 좋은데 여기에 식민지근대화론자라는 딱지를 붙여서 학문 외적인 발언들에 의해서 사회경제사학계의 여론이 쏠리다보니 소농사회론에 대한 유의미한 반박자료도 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주류이론은 바뀌지 않는 상황이다. 자기들이 옳은 것 같고 저쪽은 방법론도 어설픈데 우리만 매도당한다는 설움이 쌓여서 이상하게 터져나온게 아니었을까?

 

이 책을 보기 전에는 아키타현의 위치도 몰랐고 아는거라곤 <명견 실버>의 모델인 아키타견의

산지라는 것 뿐이었다. 전국시대의 유서깊은 다이묘인 사타케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쪽으로 줄을 잘못 섰다가 도쿠가와 막부에 미운털 박혀서 본거지를 이전하는 '전봉'을 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다케 가는 궁벽한 동북쪽 산자락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친다. 아키타 번주와 가신들이 은광과 동광을 통해 번의 살림을 꾸려보려는 악전고투의 노력이 이 책의 내용이다.

(저자인 서강대 윤병남 교수는 아키타 번의 광산업을 통해 막번관계를 재조명하는 것에 중점을 두긴 했는데 나는 그쪽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1차 사료를 분석할 능력도 없는 문외한이 조선후기가지고 계속 비슷한 소리 하는거 구경하느 시야를 돌려서 당시 일본의 경제사를 살펴보는게 유익하구나 싶다. 같은 방식으로 중국쪽도 살펴보면 좋을듯. 

 

조선후기 지방관과 토호들의 눈을 피해서 물주인 거상들이 덕대를 고용해서 광산을 경영하고 잠채를 했다지만 과연 이 책에서 소개하는 아키타 현의 광산 경영에 비하면 어느 정도 시스템이 갖춰진 상태라고 봐야할지.

 

일본에 비해 작달막한 영토에 갑오개혁 전까지 조세의 2/3를 물납으로 냈던 경제수준과 2년의 지방현감 임기조차 채우지 않고 수시로 후임자를 보냈던 강력한 중앙집권제도, 관리, 양반, 향리들의 지독한 토색질로 수확 증대나 부수입을 추구할 동기조차 가지지 못했던 농민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이라는 타이틀은 너무 우리나라에만 매몰되서 바라본 시각이 아닐까?

 

도쿄의 '긴자(銀座 )'라는 지명이 에도막부가 막부의 최고 재정담당 부서인 간조쇼가 감독하는 부속기관인 은화 주조기관의 명칭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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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쪽

 

광산촌에서의 연공미 판매 수입을 포장하기 위해서는 쌀의 독점판매가 요구되었다. 광산촌의 인구가 크면 클수록 번의 수입도 늘어났다. 우메즈 마사카게가 "광산은 곧 사람이고, 사람은 곧 광산이다."라고 말했는데, 바로 광산촌 인구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이었다. 사람들을 광산촌으로 유인하는 것은 번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이었고, 광맥의 상태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144쪽

 

번은 광산과 광산촌에 대한 접근을 독점하고 있었고, 이러한 통제가 번에게 커다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번의 광산촌 통제의 핵심은 좁은 계곡의 통로에 설치한 주분노이치야쿠(十分一役)였는데, 외부에서 유입되는 모든 물품에 10%의 통관세를 부과하였다. 물건을 반입해 들여오는 항구에서 광산촌에 이르는 모든 경로가 번의 엄격한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번은 유입되는 모든 물푸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다.

 

192쪽

 

중국 상인들은 구입한 구리를 정부의 주전국에 정해진 가격으로 판매하였기 때문에 손익 관계가 분명하였다. 네덜란드 상인은 아시아와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상인보다 가격 수용에 좀 더 여유가 있었지만, 그들의 거래가 구리의 최고 구입가를 정한 동인도회사 본부의 지시에 의해 수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그러한 것만은 아니었다.

 

207쪽

 

수입 증대를 위한 번의 금융 방면의 노력은 계속되었고, 1754년 번은 지폐인 '한사쓰' 발행이라는 보다 야심찬 계획을 들고 나왔다. 17세기말 후쿠이 번이 처음 발행한 이후 다수의 번이 막부로부터 한사쓰 발행 거라를 받았다.

 

한사쓰 발행의 유행은 도쿠가와 경제의 두 가지 경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첫째는 번에서 화폐 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고, 둘째는 재정 운용에 있어서 번이 점점 더 금융 수단에 의존하게 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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