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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3 교토의 역사(2014)

독서일기/일본

by 태즈매니언 2015. 6. 21.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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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을 먼저 읽고 3권을 읽었더니 흡수한 지식들이 꼬인 느낌이 든다. 일본사에 대한 통사를 읽고나서 여행가서 눈에 들어오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 때 그 때 공부해야지. 살아있는 교토를 최소한 10번은 가고 싶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역사유적 중에서 이렇게 열번은 더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지. 혹여 역사적 전통을 간직한 소도시의 주민으로 살게 된다면 내 집과 앞마당을 단장하는 것부터 그런 도시의 기풍을 만드는데 이바지하고픈 생각은 있다. 우리나라도 이제 집값의 등락에 따라 돌아다니는 유목민들의 시대는 저물어가니 차차 변하리라 믿는다. 이런 걸 이미 한참 전에 이룩한 교토시민들은 자기네 도시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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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쪽

 

<신찬성씨록>은 8세기 말에 중앙정부에서 일정한 정치적 자격을 갖춘 가문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천황의 자손을 칭하는 '황별', 신의 자손을 칭하는 '신별', 대륙에서 건너온 '제번'으로 분류했다.

 

이를 보면 교토 나라 아스카 오사카 지역에 있던 총 1,182개 씨족의 계보가 실려 있는데 그 중 도래인을 가리키는 제번 씨족이 324씨로 대략 30%를 차지한다. 이 비율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역사서에 2,385씨족 중 710씨족이 대륙(대부분 한반도)에서 건너간 씨족이라는 연구 결과와도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251쪽

 

기요미즈 자카는 청수사를 찾는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아 수요 증가에 맞춰 잡화점과 식당이 들어서면서 상가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결국 오늘날 같은 번화가가 된 것은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때 외국인들과 도쿄 등 전통을 잃어버린 대도시 사람들이 이 오래된 동네 분위기에 매료되면서부터라고 한다.

 

279쪽

 

나는 손가락을 꼽아가면서 삼국의 문화적 전성기를 나열했다.

 

"첫번째는 8세기, 중국은 이태백과 두보로 상징되는 당나라 현종시대, 한국은 석굴암과 에밀레종을 낳은 통일신라 경덕왕시대, 일본은 동대사 대불과 흥복사 불상이 보여주는 덴표시대죠.

그리고 300년쯤 지난 11~12세기, 송나라는 휘종 황제의 문예부흥을 맞이했고, 고려는 고려청자로 상징되는 예정 인종 의정 연간의 문화적 난숙이 있었는데, 이 때 일본은 평등원에서 보이는 후지와라시대의 화려한 귀족문화가 꽃피었죠.

 

또 300년 지나 15세기가 되면 명나라 선덕 홍치 연간의 청화백자, 조선 세종황제의 한글 창제, 일본 무로마치시대의 금각사, 은각사, 용안사로 상징되는 문화적 창달이 있었죠.

 

그리고 또 300년이 지나 18세기가 되면 청나라는 강희 옹정 견륭의 문예중흥, 조선은 영조 정조시대의 문예부흥, 일본은 에도시대의 난숙한 도시문화가 있었죠."

 

296쪽

 

나는 민주나 평등의 개념이 없었던 1천년 전에 어떻게 평등원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신기했었다. 그러다 평등원 주지 가미이 몬쇼 스님이 쓴 <평등원 이야기>를 보니 1563년, 평등원의 초대 주지스님이 지은 이름이라면서 그 진정한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의내릴 수 있다고 했다.
"평등이란 서로 다른 개성이 함께 있음을 말하는 것이죠, 그것이 평등입니다."


324쪽

 

일본인들이 고건축 관리에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가는 이세신궁의 경우 20년마다 지붕을 개비하는데, 1500년을 두고 오늘날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놀랍고 존경스럽다.

 

334쪽

 

또한 중국의 옛 동전이 무려 28톤이나 인양되었다. 1세기부터 14세기까지 66건 299종 약 800만개나 되는 엄청난 양이다. 그 중엔 지대통보, 대원통보 등 원나라 동전도 있어서 이 배의 하한연대를 말해준다. 이렇게 중국 고화폐가 많이 실린 까닳은, 당시 일본이 이를 고물로 수입하여 일본 화폐를 주조할 때 재사용했기 때문이었다.

 

374쪽

 

우리나라를 '근역(무궁화가 많은 땅)'이라고 하여 이를 국화로 삼은 뜻을 모른느 바 아니지만 그렇게 피할 바에야 차라리 온 국민이 좋아하는 진달래같은 것으로 바꾸는 편이 오히려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북한은 목란꽃(산목련)을 국화로 삼고 있다.

 

문화재청장 시절에 어떻게 무궁화가 국화로 지정되었는가 알아보려했더니 그것은 문화재청 소관이 아니라 안전행정부 소관이니 건드리면 다친다는 충고만 들었다.

 

382쪽

 

나는 최치원이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탑비 비문에 쓴 다음과 같은 글에서 깨우진 바가 컸음을 말해주었다.

스님은 홀로 깨치기를 좋아하고 남을 가르치기엔 마음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산길을 가 는데 한 나무꾼이 나타나 '먼저 깨우진 자가 나중 깨칠 사람을 위하여 가르치는 데 소홀히 하면 안 된다.'라고 꾸짖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386쪽

 

참선에 필요한 것은 졸음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차였다. 영서 스님은 중국에서 들여온 차나무 씨앗을 곳곳에 나눠주었는데 명혜 상인이 이를 받아 고산사 뒤뜰에 심은 것이 성공적으로 발아하여 일본에서 처음 차를 재배하게 되었다.

 

391쪽

 

우리의 경우 차경으로 삼을 자리만 잡으면 나머지는 그냥 자연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마치 액자에 집어넣듯이 마루와 차양과 기둥으로 풍광을 규정해 놓는다. 그래서 일본 정원은 건축적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우리 정원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맡겨놓는 여백이 있다. 어느 것이 더 좋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건축적 디자인적 조원적 컨셉의 차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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