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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준] 펍, 영국의 스토리를 마시다(2011)

독서일기/미시사

by 태즈매니언 2015. 8. 10.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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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여행기들이 참 많이 쏟아져 나오는데 출판되고 몇 년이 지나서 문닫는 까페나 식당이 생기면 몇 달전에 포스팅한 블로그 글보다 가치가 없어지는 책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그래서 굳이 읽을 생각도 안들고.

 

그런데 이 책은 영국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펍 문화를 소개해주고 있어서 유익하게 읽었다. 현지에서도 문닫는 펍이 늘어가고 있다고 하니 책에서 소개한 펍 중에 없어지는 곳도 생기겠지만 동시대의 미시사라 할 수 있는 책이라 그렇다고 가치가 떨어질 것 같지는 않다. 주간동아 편집장 출신의 저자의 풍부한 배경지식때문에 간간히 영국사에 대한 책으로 착각할 정도로 옆길로 새긴하더라.

 

그래도 장미전쟁에 대한 서술을 읽다보니 재미있게 보고 있는 <왕좌의 게임> 중 상당 부분이 장미전쟁 시기 영국의 경험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서 유익했다. 하얀 수사슴과 붉은 사자 같은 문장만 보더라도...장미전쟁을 종식시킨 헨리 7세의 후계자 헨리 8세가 후계구도가 불안할 때 장미전쟁과 같은 내전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들에 그렇게 집착해서 결혼을 여섯 번이나 했겠구나 하는 것과 장미전쟁을 겪은 국민들이 왕의 패륜에 눈을 감고 종교 분리를 감수했겠구나.

 

근대적인 상하수도가 보급되기 이전 깨끗한 물을 찾을 수 없었던 환경상 영양도 있고 값도 저렴한 맥주가 선호되었고, 산업혁명과 도시화를 가장 먼저 겪어 시골에서 이주한 노동자들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그나마 알콜로 풀 수 밖에 없었던 상황, 강력한 경쟁자였던 진에 대해 높은 세금 부과, 비잔티움의 커피하우스와 같은 공론장의 역할 등 영국에서 펍이 성행했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닉 혼비의 <피버 피치>를 떠올려 보니 아직도 런던의 노동계급들에게 펍은 축구와 함께 구심점이 되는 문화공간이겠거니 싶다.

 

아 런던 가보고 싶네. 1623년에 세워진 런던에 유일하게 남은 목조식 전통 펍이라는 코벤트가든의 <Lamb & Flag>와 와핑 역 근처에 있다는 펍 입구에 교수대와 포승줄이 있고 간판에 교수형을 받는 캡틴 키드를 새긴 <Caption Kidd>, 템스강변의 아경과 강바람에 취해서 밀레니엄 브릿지를 바라볼 수 있다는 <Founders Arms>. 특히 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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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쪽

 

영국의 웬만한 펍들은 그 역사가 100년을 훌쩍 넘는다. 2, 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펍들도 부지기수이다. 그러므로 전통 있는 펍으로 명함을 내밀려면 적어도 500년 역사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허트포드셔 세인트 올번스에 있는 '눍은 싸움닭' 펍은 8세기부터 있었던 술집 터에 11세기 건물을 다시 올린 구조물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1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가장 오래된 펍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라 있다.

 

노팅엄의 '오래 전 예루살렘 여행' 펍도 1189년 노팅엄 성 양조당 터에 세워진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여인숙이다.

 

35쪽

 

18세기가 되면서 잉글랜드의 술집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맥주 산업은 거대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는 1688년 명예혁명의 성공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진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당시 왕실은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가 생산하는 브랜디와 같은 다른 수입 주류에 대해서는 엄청난 세금을 부과한 반면, 진은 허가받지 않아도 제조할 수 있도록 시장을 열어 놓았다.
(중략)
1740년이 되자 진 생산량은 맥주보다 6배나 늘었다. 맥주에 비해 너무나 저렴하게 취할 수 있는 진은 가난한 사람들을 '진 광신도'로 몰고 갔고, 진은 맥주보다 대중적인 술이 되어 갔다. 당시 런던의 1만 5천여 개 술집 가운데 절반 이상이 진 전문이었다.
(중략)
그래서 1751년 정부는 또 한 번 진에 관한 법률을 내놓는데, 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골자는 진 제조업자들이 허가받은 소매업자에게만 판매하고, 진 가게들은 지방장관 사법권의 통제를 받도록 한 것이었다. 그리고 1830년 조지 4세가 맥주집에 관한 법률을 공표한 것은 다시 맥주의 전성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법은 집주인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이 자신의 집에서 모든 맥주를 팔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었다. 단지 영업 신고를 하면서 2기니의 세금만 내면 되었다.

 

50쪽

 

1393년 왕 리처드 2세는 펍 간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칙령을 내린다. 이 칙령은 "마을에서 맥주를 팔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반드시 '맥주 말뚝'을 내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맥주를 압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반드시 간판을 걸라고 명령한 이유는 다름 아닌 세금을 더 걷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래야 맥주의 품질을 결정하고 세금을 메기는 검사관이 펍을 쉽게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52쪽

 

리처드 2세 당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의 맥주 검사관이 맥주를 마셔보고 맥주 품질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맥주 웅덩이에 철퍼덕 주저앉는 것으로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튼튼한 가죽 반바지를 입고 펍을 덜아다녔는데, 펍 주인은 검사관이 오면 나무 의자에 맥주를 부었다. 그러면 검사관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일어섰을 때 느끼는 점성, 즉 얼마나 끈끈한지의 정도로 알코올의 강도를 알았고, 그에 따라 세금을 부과했다.

 

74쪽

 

그런데 금욕적이어야 할 수도승이 술을 만들고 팔았다고?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승려가 음주를 일삼고 그것으로 모자라 판매까지 했다는 이야기인데, 거기에는 어떤 역사적 배경이 숨겨져 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중세 유럽은 물이 깨끗하지 못해서 그냥 먹기가 어려웠고, 의학 기술이 발전하지못햇기에 약도 변변치 않았다. 그래서 당시 지식인 계층이었던 수도사들이 여러 지방에서 맥주 제조법을 발전시켰다. 즉, 맥주는 깨끗하지 못한 물을 대신하거나 액체 빵으로서의 영양분 공급원 역할을 했으며, 흑맥주를 약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수도원은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여관 기능을 했는데, 맥주는 이 때 여행객에게 대접하는 음료로도 사용되었다.

 

139쪽

 

당시 영국 왕실은 많은 해적들을 공개 처형한 다음 시신을 철제 버팀목에 매달아 템스 강가의 잘 보이는 언덕에 전시했다. 이 때문에 당시 템스 강 항구에서 바다로 나가거나, 바다에서 항구로 들어오는 모든 선원들은 배에서 한 시간 이상씩 이 기괴한 시신들을 봐야 했다. 이 시신들 역시 새들이 쪼아 먹는 것을 방지하고, 가능한 한 오래도록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배의 부식을 막는 데 사용하는 타르를 몸 전체에 발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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