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의 창립기념일로 얻은 귀중한 평일 휴무를 아내와의 점심과 이 책(원제는 <Thinking fast and slow>다.)을 읽는 일로 다 보냈다.
대니얼 카너먼에 대해서는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학자 중 한 명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과 위키를 살펴보니 시각적 인식을 중심으로한 인지심리학, 아모스 트버스키와의 공동연구로 수행된 판단과 의사 결정에 대한 연구(전망이론), <넛지>의 리처드 탈러와 연구한 행동경제학, 그리고 행복심리학 연구까지 일류학자 네 명을 합쳐놓은 듯한 사람이었다.
특히 최근에 읽었던 아툴 가완디의 <Being Mortal>에서 나왔던 '기억하는 자아'와 '경험하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탈러와 선스타인의 <넛지>의 기반이 된 아이디어가 어떻게 도출되었는지도.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견해를 경청하는 노학자의 왕성한 호기심도 멋져 보였다.
이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그가 평생 연구해왔던 분야들을 강의하는 강의노트를 바탕으로 일반교양서로 펴낸 책이다. 그래서 잘 읽히지만 엄밀한 이해를 돕는 그림이나 도표 등의 제시는 조금 아쉽다.
게다가 허겁지겁 읽다보니 이 책에서 대니얼 카너먼이 언급한 이론과 통찰들이 실제 내 행동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짚어보는 시간이 부족했다. 이런 책은 단번에 읽는 것보다 열 명 정도가 다 같이 읽고서 한 파트씩 발제하고 자기가 했던 행동의 사례들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식으로 천천히 읽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텐데.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는 평속 15km/h의 느린 속도로 자전거타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아래 이 책의 61페이지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산책은 카너만이 말한 '시스템2'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지만 산책시에는 아이폰을 꺼내보지 않으려고 자제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 게다가 세종시의 내가 사는 곳 주변에는 괜찮은 산책로도 없다.(일산에서는 산책할만한 곳이 꽤 있다.) 그런데 슬렁슬렁 자전거 페달을 돌리는행위는 산책처럼 긴장이나 힘도 필요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할 수 있다. 게다가 일산과 세종시는 자전거 탈 여건도 좋다. 다만 자전거 타고 언덕을 오르거나 신호등의 점멸을 신경쓰고, 도착해야할 시간과 예상주행시간을 고려하다보면 내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은 날아가버린다.
서울가정법원에서 작년 9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체크리스트 방식으로된 객관식 형태의 이혼소송 소장과 답변서, 조정신청서 양식에 따른 변화 여부도 좋은 연구 소재가 될 것 같다. 비슷한 유형의 이혼사건이 그 이전에 변호사가 작성하여 청구했을 때와 체크리스트로 청구되었을 때 인용될 확률이 어떻게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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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쪽
산책 이상으로 속도를 높이면 걷기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진다. 더 빠른 걸음으로의 전환은 논리 정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급격히 저하시킨다. 속도를 높일수록 걷기라는 '경험'과 의도적으로 빠른 속도를 유지하려는 '노력'에 더 자주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따라서 일련의 생각에 결론을 낼 수 있는 능력은 손상된다. 빨리 걸을수록 다른 생각을 할 엄두조차 내기 힘들어진다. 속도를 늦추고 싶은 욕구를 억제하려면 걸으며 내 몸을 빠르게 움직이려는 신체적인 노력 외에도 자제력이라는 정신적인 수고를 해야한다. 자제력과 의도적인 사고는 똑같이 제한적인 양의 노력이 필요하다.
65쪽
'시스템2'에 큰 부담을 주는 활동들은 자제력을 요구하는데 자제력을 발휘하면 자아가 고갈되고 불쾌해진다. 인지부담과 달리 자아 고갈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동기 손실을 뜻한다. 한 가지 일에 자제력을 발휘한 뒤라면 다른 일을 할 때 노력한 것 같은 느낌을 받지 못한다. 그 일을 정말 해야 했다면 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몇 가지 실험을 통해 알아보니, 강력한 인센티브가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자아 고갈의 효과를 거부할 수 있었다.
81쪽
기억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관련해 또 다른 중요한 발전은, 점화 현상(priming effect)이 개념과 단어들에게만 국한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과 감정이 전혀 모르는 사건들에 의해 점화될 수 있다는 낯선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305쪽
폴 밀의 연구는 놀라운 결론을 제시한다. 예측적 정확성을 최대한 높이려면 최종 결정은 공식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타당성이 낮은 환경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일례로 숙성되지 않는 와인의 미래 가치를 예측하려면 품질을 평가하는 전문가는 대체로 상황을 더 낫게 만들기보다는 더 악화시킬 정보의 출처를 갖는다. 그들이 와인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날씨가 와인 품질에 미치는 영향을 잘 이해하고 있더라도 공식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328쪽
이런 계획 오류의 사례는 개인, 정부 기업이 겪는 경험 주위에 많이 있으며 모두 끔찍한 결과로 이어진다. 다음은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1969~1998년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추진된 철도 프로젝트들의 소요비용을 추정한 연구결과가 2005년에 발표되었다. 그 결과, 프로젝트들의 90% 이상에서 철도 이용 승객 추정치 숫자가 부풀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추정치와 실제 철도 이용객의 차이는 널리 알려졌지만 이 30년이란 기간에 철도 이용 승객 추정법은 개선되지 않았다. 철도 계획 수립자들은 평균적으로 새로운 철도 프로젝트 이용객 수를 106% 부풀려 추정했으며, 비용은 처음 추정보다 45% 더 들었다. 이후로도 이런 차이를 보여주는 증거들은 계속 쏟아져 나왔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무시했다.
340쪽
전문가의 과신은 여기서도 환자들에 의해 더욱 장려된다. 자신감을 보이지 않는 의사는 약해 보이고 신뢰받기도 어렵다. 자신감은 불확실성보다 더 인정받으며, 환자에게 불확실한 말을 하는 의사들은 거부당하는 문화가 팽배하게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의 무지를 100% 인정하는 전문가는 더 자신감 넘치고 고객에게 더 많은 신뢰를 받는 다른 전문가로 교체될 것이다. 불확실성의 객관적 인정은 합리성의 초석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또한 걸린 게 많다면 자신이 그저 추측만 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인정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란 더욱 힘들다. 아는 척이 더 좋은 방법일 때도 잦다.
351쪽
베르누이는 효용성 이론을 통해서 빈자들은 보험을 들고 부자는 그 보험을 더 가난한 사람에게 파는 이유를 설명했다. 100만의 손해는 1,000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보다 300만으로 시작한 사람에게 훨씬 큰 효용성 손실을 유빌한다. 따라서 더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에게 위험을 전가하기 위해 행복하게 보험료를 지불할 것이다. 보험이란 것이 원래 그렇다.
386쪽
사람들을 포함한 동물들은 이득을 얻기보다는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열심히 싸운다. (중략) 인간사의 경우도 이와 똑같은 단순한 원칙이 기업 구조조정과 조직재편, 관료주의 합리화, 세법 단순화, 혹은 의료비 절감 등의 문제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설명해준다.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듯, 개혁 계획은 언제나 많은 승자와 패자들을 낳는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어떤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면 잠재적 패배자들은 잠재적 승리자들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결연한 모습을 보일 것이며, 결과는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면서 당초 계획보다 돈은 더 많이 들고 효과는 덜한 계획이 될 것이다. 개혁에는 일반적으로 현재 기득권자들을 지켜주는 조부조항(grandfather article)이 들어간다. 그 결과로 기존 근로자의 해고가 아니라 자연 감소를 통한 감원이나 이후 입사할 신입사원들에 한해 임금과 복지혜택을 삭감하는 일이 벌어진다. 위험 회피는 조직과 개인 모두 현상태가 최소 한도로만 변하는 걸 선호하는 강력하고 보수적인 힘이다. 이러한 보수주의는 우리가 이웃, 결혼생활, 직장에서 안정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는 중력에 이끌리듯 기준점 주위에 함께 모여서 생활한다.
443쪽
탈러는 소비자 행동을 주제로 발표했던 초기 논문에서 주유소가 현금 결제 고객과 카드 결제 고객에게 다른 기름 가격을 부과해도 되는지를 놓고 벌어진 논쟁을 분석했다. 신용카드 로비단체는 이러한 가격 책정을 불법으로 규정하려 애썼지만 동시에 만일의 사태를 위한 대비책도 마련해 놓았다. 이 단체는 만일 결제 금액의 차이가 허용된다면 신용카드에 추가 요금이 붙어서가 아니라 현금을 낼 할인을 받게 되기 때문에 가격 차이가 나는 것이라고 주장할 예정이었다. 그들의 이런 심리는 건전했다. 사람들은 추가 요금을 지불하기보다는 할인 금액을 기꺼이 포기할 테니 말이다. 이 두가지는 경제적으로 동등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동등하지 않을 수 있다.
454쪽
2003년 발표된 한 논문을 보면, 호주의 장기 기증률은 100%에 가깝지만 독일은 12%, 스웨덴은 86%, 덴마크는 4%에 불과하다.
이처럼 국가별로 나타나는 장기 기증률의 엄청난 편차는 중요한 질문 형식때문에 생기는 프레이밍 효과이다. 장기 기증률이 높은 국가에서 기증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뜻을 직접 표시해야 하는 '옵트 아웃(선택적 거부)' 방식을 사용한다. 이 단순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부 의사가 있다고 간주된다. 반면, 장기 기증률이 낮은 국가는 '옵트 인(선택적 동의)' 양식을 쓴다. 즉 장기기증을 하고 싶다면 직접 상자에 표시해야 한다. 이 차이가 전부다. 따라서 장기 기증률을 끌어 올리는 최상의 방법은 귀찮게 굳이 표시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채택되는 디폴트 옵션을 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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