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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웨더포드/정영목 역]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2004)

독서일기/동아시아

by 태즈매니언 2015. 9. 2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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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어본 몽골에 대한 책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 칭기스 칸의 일대기 중 중요했던 전투들에 대해서 몇 줄로 정리하고 넘어가는 건 아쉽지만 딴지 편집장 필독의 <테무진 to the 칸>으로 해결하면 된다. 번역가 정영목씨의 번역도 정갈하고.

 

저자가 시야가 무척 넓고 참신하다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나서 보니 저자 잭 웨더포드는 역사가가 아닌 인류학자였구나. 책 말미에 붙어있는 참고문헌 목록을 보니 이런 훌륭한 책이 쉽게 나오기 힘든 이유를 알겠다. 선택한 주제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의 풀무질에 지성과 끈기로 단련한 역작이다.

 

이 책의 마지막 50페이지를 읽기 전까지는 도대체 왜 책 제목을 이렇게 지었는지 불만이었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생각하니 칭기스 칸과 그의 제국이 남긴 유산의 가장 큰 수혜자가 서유럽이라는 호소력있는 주장과 아주 잘 어울리는 제목이었다.

 

칭기스 칸이 처절한 삶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근대사회의 기본이념과 동해부터 지중해까지 일군 교역로로 만든 팍스 몽골리카의 가치를 일고싶으면 이 책을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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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쪽

 

하루에 말을 타고 거의 80킬로미터를 달려보니 몸통에 비단 5미터를 꼭 동여매면 실제로 장기가 제자리를 유지하고 구토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50쪽

 

구두 통신체계는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그 내용을 매번 각 사람에게 정확하게 되풀이하고, 또 상대방은 들은 대로 기억해야 했다. 장교들은 병사들이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운을 맞추어 내용을 꾸몄는데, 여기에는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는 표준화된 틀이 있었다. 몽골 전사들은 일군의 고정된 선율과 시의 양식을 알고 있었으며, 여기에 명령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 말을 즉흥적으로 집어넣을 수 있었다. 따라서 병사가 명령을 듣는 것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노래의 새로운 가사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155쪽

 

몽골군에게 농부의 논밭은 그저 풀밭일 뿐이었다. 농민은 고기를 먹는 진짜 인간이라기보다는 풀을 뜯는 짐승과 같았다. 몽골군은 풀을 먹는 사람들에게 소나 염소를 가리킬 때 쓰는 낱말을 사용했다. 농민무리는 가축떼일 뿐이었다. 병사들은 밖에 나가 농민을 모으거나 쫓을 때 야크를 몰 때와 똑같은 용어, 정확성, 감정을 보여주었다.

 

187쪽

 

칭기스 칸은 몇몇 도시의 조직적 파괴 외에도 관개체계를 애써 파괴하여 넓은 땅의 주민이 다 흩어지게 하기도 했다. 관개 시설이 없으면 농부들은 떠나고 밭은 초지로 변한다. 이런 넓은 목초지는 군대를 따라다니는 짐승 무리 - 미래의 원정을 위해 예비로 끌고 다녔다 -가 머물 공간이 된다. 칭기스 칸은 중국 북부를 떠나 몽골로 돌아가면서 농경지를 짓밟아 놓았듯이, 자신의 근대가 드나드는 길목에 말을 비롯한 짐승들이 풀을 뜯을 수 있는 넓은 목초지를 마련해놓으려 했다. 이 짐승들이야말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231쪽

 

몽골군은 유럽 북부 군대 대부분을 도륙하고 나머지는 분산시켜 무력하게 만들자 폴란드와 독일의 도시들로부터 철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지역의 사람들은 그들이 전투에서 이겨 침략자를 물리친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전사한 헨리크 2세는 순교자가 되어 경건왕 헨리크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그의 주검이 발견된 바로 그 자리에 베네딕투스 수도원이 세워졌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인 19세기에 프로이센 정부는 이 수도원을 군사학교로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미래의 독일 장교들을 훈련하면서 먼 옛날 그곳에서 몽골군이 구사했던 전술을 특별히 강조했다.

 

239쪽

 

몽골 장교들은 유럽 침공의 물질적 성과에 실망하여 원정에 약간이라도 이익이 있음을 보여주려는 마음에 크림 반도에 자리잡은 이탈리아 상인들과 거래를 했다. 몽골군은 물자를 가져가는 대신 유럽에서 잡은 포로를 다수 남겨주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특히 젊은 포로들을 데려가 지중해 근방에서 노예로 팔았다.
(중략)
이탈리아인은 몽골인에게 제품을 공급하고 그 대가로 슬라브인을 지중해시장에 팔 권리를 얻었다.

 

이렇게 젊은 사람들을 노예로 팔게 되면서 훗날 몽골인은 그 결과로 인해 공경에 처하게 된다. 이탈리아인은 노예 대부분을 이집트 술탄에게 팔았고, 술탄은 그들을 모아 노예부대를 만들었다. 20년 뒤 몽골군은 주로 슬라브인과 킵착인 노예로 이루어진 이 부대와 만나게 될 운명이었다. 이들은 몽골군과 싸워본 경험이 풍부했으며, 심지어 노예로 팔려오기 전에 몽골어를 배운 사람도 많았다. 몽골군은 현대 이스라엘의 갈릴리 해 부근에서 이들과 만나 싸우게 되는데, 그 결과는 처음 러시아평원에서 그들을 만났을 때와 매우 달랐다.

 

251쪽

소르칵타니의 업적에 대한 가장 뛰어난 찬사는 이븐 알 이브리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만일 내가 여자들 가운데 이런 여자를 한 명만 더 볼 수 있다면,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겠다." 소르칵타니는 자식들에게 세계 역사상 가장 크고 부유한 제국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네 아들은 이 제국을 조각내기 시작한다.

 

319쪽

 

몽골 제국의 행정구역은 중국, 모굴리스탄, 페르시아, 러시아 크게 넷으로 나뉘었지만, 다른 지역의 물자에 대한 요구는 줄지 않았다. 정치적 분열 때문에 오히려 과거의 분배 제도를 보존할 필요가 강해졌다. 한 칸이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그들의 몫을 공급하지 않으면 상대편에서도 자신의 영토에 있는 그 칸의 몫을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서로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정치적 분쟁을 넘어섰던 셈이다.

 

326쪽

 

몽골은 페르시아를 장악하면서 그곳에 농업을 장려하고 농법을 개선할 부서를 설치했다. 수천 년에 걸친 경작 때문에 이 지역의 토양은 부식되고 생산성이 낮았다. 몽골은 중국으로부터 종자를 다양하게 수입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328쪽

 

몽골은 문화를 휴대 가능한 형태로 바꾸었다. 단순히 물자를 교환하는 것만으로 부족했다. 새로운 생산물을 사용하려면 지식체계 전체를 옮겨와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약품은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년 가치가 없는 교역품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몽골 왕궁은 페르시아와 아랍의 의사를 중국에 수입했으며, 중국 의사를 중동에 수출했다.

 

333쪽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 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 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문화에는 원래 몽골이 강조했던 자유교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 세계체제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 인식의 대전환'에 따른 모든 혜택을 입었다.

 

349쪽

 

페스트는 유럽을 고립시켰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와 러시아에 사는 몽골인을 중국이나 몽골과 차단했다. 페르시아의 몽골 통치자들은 이제 중국에 있는 자기 소유의 토지와 작업장에서 나온 물자를 얻을 수 없었다. 각 지파 사이에 연결이 끊어지자 서로 맞물리는 소유제도도 붕괴했다. 페스트는 국토를 유린했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타락시켰고, 교역과 공물을 차단하여 몽골의 황금 가족으로부터 일차적인 소득원을 빼앗았다.

 

몽골인은 거의 100년 동안 서로간의 물질적 이해관계 덕분에 그들을 가르는 정치적 단층선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통일성이 흔들릴 때에도 문화적, 상업적으로 통일된 제국을 유지했다. 그러나 페스트의 살육이 시작되면서 중심이 버틸 수가 없었고, 그 결과 복잡한 체제는 붕괴했다. 몽골제국은 사람, 물자, 정보가 제국 전체를 끊임없이 빠르게 돌아다녀야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런 연결이 없으면 제국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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