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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끼/권영주 역] 애프터 다크(2004)

독서일기/일본소설

by 태즈매니언 2016. 1. 22.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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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끼의 소설 중 <양을 쫓는 모험>과 <태엽감는 새>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그 이후의 소설들은 변주되는 느낌이지만 계속 보고는 있다. 멋모르고 2015년에 번역 출간된 신작으로 착각하고 후다닥 빌려와서 읽은 책. 장편보다는 중편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알고보니 2004년도에 나온 <어둠의 저편>이라고 번역되어 나왔던 책인데 판권이 만료되서 다른 출판사에서 원제인 <After Dark>로 재출간한 책이었다. 사서 봤으면 은근히 하루끼의 신작인양 마케팅하는 출판사 괘씸했을 것 같다.  


도쿄의 뒷골목에서 보내는 어느 날 밤 7시간에 대한 영화를 보는 느낌으로 읽었다. 친절한 하루끼씨가 주요 씬마다 음악을 틀어주는데 도무지 아는 곡이 없어서 아쉽더만. 읽으면서 계속 십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70년대 취향인 여주인공 마리의 캐릭터가 어색했다. 중년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들 같은 자연스러움을 바라는 건 무리겠지만. 


그리고, 소설 첫 머리에서 그리는 콘크리트 더미로 된 도시의 밤에 대한 묘사가 정말 빼어나서 매혹되더라. 번역도 훌륭했겠지만 필터를 거쳤는데도 이렇게나 탐미스러운 문장이라니. 아마도 어제 봤던 마츠모토 타이요의 <철콘 근크리트>의 배경이 되는 다카라초를 글로 옮기면 이런 문장이겠구나 싶어서 홀딱 빠졌던 것 같다.('철콘 근크리트'에 대한 독후감은 과연 언제쯤 끄적일 수 있을까.)


다 읽고 나니 나도 등장인물들처럼 진한 북해도산 우유 한 팩을 쭈욱 들이키고 싶어진다. 이왕이면 유지방 4%짜리로. 담배연기, 음식점과 술집 환풍기가 내뿜는 눅눅하고 쾨쾨한 온갖 냄새가 뒤섞인 도시의 밤공기에 찌든 식도를 달콤한 우유로 물청소하고서 달게 잘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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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쪽


보이는 것은 도시의 모습이다.

우리는 밤하늘 높이 나는 새의 눈을 통해 상공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다. 넓은 시야 안에서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생물로 보인다. 또는 몇몇 생명체가 뒤엉켜 만들어낸 하나의 집합체로 보인다.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 신체의 말단까지 무수한 핏줄이 뻗어 피를 순환시키고 쉴 새 없이 교체해준다. 새로운 정보를 보내고 낡은 정보를 회수한다. 새로운 소비를 보내고 낡은 소비를 회수한다. 새로운 모순을 보내고 낡은 모순을 회수한다. 신체는 맥박의 리듬에 맞춰 도처에서 점멸하고, 발열하고, 꿈틀거리고 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점은 지났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초대사는 감퇴하지 않고 계속된다. 도시가 발하는 웅웅소리는 통주저음으로 그곳에 존재한다. 기복이 없이 단조로운, 하지만 예감을 내포한 소리다. 


117쪽


"예를 들자면, 그래, 문어 같은 거야. 바닷속 깊은 곳에 사는 거대한 문어.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긴 다리 여러 개를 꾸불꾸불 움직여서 어딘가를 향해 어두운 바닷속을 나아가. 난 재판을 방청하면서 그런 생물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건 다양한 형태를 취해. 국가란 형태를 취할 때도 있고, 법률이란 형태를 취할 때도 있어. 더 복잡하고 성가신 형태를 취할 때도 있어. 잘라내도, 잘래내도 다리가 자꾸 생겨. 아무도 그 놈을 죽이지 못해. 워낙 강한 데다, 워낙 깊은 곳에 사니까. 심장이 어디 있는지 그것도 몰라. 내가 그 때 느낀 건 심한 공포였어. 그리고 아무리 멀리 도망친들 그놈한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 같은 감정하고. 그놈은 내가 나고 네가 너라는 걸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아. 그놈 앞에선 모든 사람이 이름을 잃고 얼굴을 잃어. 우리는 모두 한낱 기호가 되고 말아. 한낱 번호가 되고 마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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