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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라면을 끓이며(2015)

독서일기/에세이(한국)

by 태즈매니언 2016. 1. 27.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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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이 책이 나왔을 때 마케팅에 기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여느 출판사도 아닌 문학동네에서 펴내는 책이고 저자 자신의 지명도 역시 한여름 극장가의 블록버스터 개봉 수준인데. 겸양이 지나친 것 아닌가? 양은냄비에 특정 라면 사은품 증정이라니. 사은품과 패키지로 팔리는 광고로 도배된 잡지들의 전략까지 빌려 왔어야 했을까? 그의 글과 관계없는 창의적인(?) 방법으로 어떻게든 더 많이 팔겠다는 출판사의 노골적인 욕심이 글의 무력함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김훈은 욕심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지위를 가진 몇 안되는 작가라고 생각했기에 좀 실망했었다. 책 설명을 보니 내가 샀던 예전에 나온 그의 에세이집에 실렸던 글들도 꽤 많았고.

 

그래서 그냥 넘어가려 했던 책이었는데..

 

많이 피곤한 상태였는데도 cover to cover로 홀딱 읽었다. 간결하면서 진부하지 않고, 잘 깎인 조각품 같은 문장과 그런 문장들을 솜씨좋게 뜨게질해낸 문단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었던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는 시를 감상할 줄 모른다. 그래서 인지 시를 읽는 느낌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묘사가 내게는 김훈씨의 문장을 읽는 느낌에 대한 표현으로 다가온다.

 

문법적으로도 고약한 언어이고, 매일같이 같이 쓰는 자모를 이용해서 싸지른 똥글들을 지겹게도 볼 수 밖에 없는 내 모국어. 매일 내 스스로 써내려가고 출력하는 부실한 글들에 진저리가 날 때도 적지 않다. 그럴 때 김훈씨의 이 책을 펴고 몇 편의 글을 읽어내려갈 생각이다. 내 머리에 잘 끓인 된장찌개를 떠먹이는 기분으로. 그럼 모국어에 대한 애정이 휴지를 적시는 물처럼 담뿍 스며나올 것 같다.

 

이 책에서 문장을 따온다는 게 전혀 의미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지만 이 것도 습관이라 오늘 특히 와닿았던 몇 군데 글귀를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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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쪽

 

어선들의 태극기는 해풍 속에서 풍화되어갔다. 태극이 모두 없어졌고 괘만 남은 깃발도 있었다. 바람에 시달리면서 태극기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 어선들의 반 토막 태극기는 살아가는 일의 수고로움과 수고의 경건함을 보여주었다. 남루는 그 경건이 드러나는 방식이며 외양이었다. 반 토막 태극기는 맹렬하게 펄럭였다. 아름다운 태극기였다. 권세 높은 관청 지붕에 높이 솟은 태극기보다 이 닳아빠진 반쪽자리 태극기는 얼마나 순결한가. 입을 벌려서 직업적으로 애국을 말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노동의 수고로움 속에서 애국은 저절로 해풍에 펄럭이고 있었다.

 

176쪽

 

국가개조는 안전관리와 구조구난의 지휘부와 조직을 재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뉘우침의 진정성 위에서 자신을 바꾸어나갈 수 있다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서 뭉개다가 무너질 뿐이다.

 

191쪽

 

어쩌다가 육필로 겉봉을 적은 편지를 받으면 마음이 부르르 떨린다. 육필은 몸의 진동을 느끼게 한다. 그때, 떨리는 몸은 나의 몸이기도 하고 편지를 보낸 사람의 몸이기도 하다. 나의 몸과 너의 몸 사이에서 신호들은 떨린다.

 

213쪽

 

사회가 고도로 조직화되고 세분화될수록 사회의 밀도는 높아가고 인간은 고립되게 마련이다. 다들 제각기 아파트와 오피스텔과 자동차와 밀실 안에 들어앉아 있다. 그 수많은 세포들의 틈새에 재난은 복병처럼 숨어 있다. 밀실에 고립된 인간들은 재난을 돌파하는 능력이 전혀 없다. 소방대원들이 그 밀실을 깨고 들어가 인간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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