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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김한영 역]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1988)

독서일기/북미소설

by 태즈매니언 2016. 2. 1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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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제목이 더글러스 케네디 작품같은 느낌이어서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지금은 일주일 정도는 픽션은 쳐다보기도 싫은 상태다. 미국의 1940-50년대 역사책을 돋보기를 움직여가며 읽은 것처럼 피곤하구나. 

반세기가 넘게 지난 시점에서 "매카시즘의 시대와 그 희생자의 이야기'라는 소재라니. 아마도 진부한 이야기가 반복되지 않을가 싶어 첫인상은 별로였다. 게다가 수십년 전의 세세한 일들을 죄다 기억하고, 셰익스피어를 줄줄 인용하는 구순의 정정하고 명철한 노인이 주요 등장인물이라니. 게다가 그 노인은 존경할만한 진짜배기 진보주의자다.(생각해보니 작고한 스테판 에셀이 있긴 하군.)

그래도 그럴 때마다 폰게임 한 두판하고 쉰 덕분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 인내에 대한 보답도 있었고. 머리 선생님과 네이선의 마지막 회상이 담긴 마지막 20페이지를 통해 이야기를 마무리짓는 서술이 압권이었다. 책 표지 날개에 빼곡히 적힌 화려한 수상이력과 찬사가 괜한 게 아니었구나. 

뉴욕과 함께 주된 공간적 배경이 되는 뉴저지의 뉴어크. 난 허드슨 강 유람선에서 멀거니 저지 시티를 봤을 뿐 가본 적도 없다. 이 소설의 정서를 공감하려다보니 뉴어크를 구체적으로 연상하게 되더라. 책을 보면서 서울과 인천 사이에 낀 80만 인구의 부천시가 떠올랐다. 지금은 다 옮겨갔다지만 중소제조업체들과 서민들의 천국이었던 80년대의 부천시가 가난한 남부 이탈리아계가 장악한 거리에 마지막으로 남은 가난한 유대인 가정의 보금자리와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미국인들의 반유대주의 정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연상할 수가 없더라. 역사책을 통해 반유대주의의 근거에 대한 설명들을 봤지만 아직도 드레퓌스 대위에 대한 당시 프랑스인들의 격렬한 증오와 편견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책을 보면 세상에는 백인, 흑인, 황인, 유대인이 있는 것 같다. 그 때도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던 뉴욕 근방에서 이렇게까지 반유대주의가 극심한 원인이 뭐였는지 모르겠다. 

무거운 문장때문에 속도가 붙지 않아 읽느라 고생하긴 했지만 번역을 거쳤는데도 느껴지는 깊이 덕분에 아마도 이미 사둔 <에브리맨>도 조만간 읽게 될 것 같다. 

미국 공립학교 교사에 대한 낮은 처우를 생각할 때 머리 선생님같은 분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희곡을 희곡으로 시를 시로 가르치는 국어 선생님을 한번쯤 만났더라면 좋았을 걸. 이 나이에도 시맹인(詩盲人)이라니.. 남탓할 나이는 지났지만 아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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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쪽

말로 세상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어. (중략) 예술가의 미덕을 입증하려는 욕망보다 예술에 더 사악한 영향을 끼치는 건 없어. 

382쪽

열광적 이념이 어떻게 한 남자에게 평생 갇혀 살아야 하는 가혹한 죄수의 모습을 안겨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선택의 자유가 전혀 없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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