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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폴란/이순우 역] 세컨 네이쳐(2009)

독서일기/농림축산

by 태즈매니언 2016. 7. 9.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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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찾아보고 있는 작가 마이클 폴란이 정원 가꾸기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녹인 철학을 제시하는 책이었다. Gardening이란 말이 참 애매한 게 베르사유 궁전의 드넓은 뜰에서 일본의 작은 가게앞 화분 두서너개까지 모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다보니 나처럼 단독주택 마당 텃밭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하지만 정원가꾸기라는 일이 갖는 의미가 그만큼 다양하다는 점을 생각할 기회를 던져 준다는 점에서 유익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도, 그저 경배의 대상으로도 보지 않는 중간적인 입장에서 정원일을 하면서 접하는 자연을 'Second Nature'라고 이름붙였거나, 관용적인 표현인 '제2의 천성'의 뜻으로 그동안 지나치게 자연을 숭배의 대상으로 보거나, 앞뜰의 잔디밭 조경을 고집하는 미국의 획일적인 정원문화에 대한 재검토를 추구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제목인 듯 싶다. 다만 처음 100페이지를 읽을 때는 이 책은 반드시 사야지 싶었는데 다 읽고 나니 그정도 느낌까지는 들지 않더라.

 

이 책 안에 사진이라고는 한 장도 없는 관계로 마이클 폴란이 코네티컷의 후사토닉이라는 외진 지역에서 1920년대의 뉴잉글래드 농장 주변을 어떤 정원으로 꾸몄는지 실제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좀 아쉬웠다. 어차피 사진에 정원의 느낌을 담을 수는 없었겠지만.

 

내가 지금 그리는 이상적인 정원은 실용성 위주라 심미적인 관점에서는 완전히 꽝이다. 우선 시골의 단층 일자형 농가주택을 매입해야 한다. 농가주택을 개축하면서 다른 건물들은 밀어버리고 광과 작업장 역할을 할 헛간과 닭장을 양 옆에 배치할 생각이다. 집 앞마당에는 질리지 않는 일본의 마른산수 풍으로 조약돌과 돌 몇 개를 깔아두고 싶다.(주차장 느낌이 나는 콘크리트 타설도, 잔디도, 자칫 진창이 될 수 있는 맨땅도 내키지 않는다.) 그 옆은 살구나무, 앵두나무, 자두나무, 배나무, 감나무를 두어 그루씩 빙 둘러 심으련다. 뒷뜰에는 열을 맞춰 텃밭 야채들과 뿌리채소, 감자 고구마 정도를 심으면 될 듯 싶고. 만약에 돈이 좀 더 생기면 송어 양어장 연못도 있으면 좋겠다. (갓 낚아올린 송어로 회나 구이를 먹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정원생활을 누리기 위한 여가시간과 재력, 체력을 모두 갖추게 될 날이 언제가 올지는 모르지만 마이클 폴란의 <세컨 네이처> 덕분에 아파트 베란다 텃밭을 벗어난 즐거운 공상에 빠져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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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쪽

 

앞뜰의 잔디는 마을의 얼굴이나 다름없었으며 뒷마당만이 사적인 공간으로 주어졌다. 뒷뜰에서는 하고 싶은 어떤 일도 할 수 있었지만 앞뜰에서는 지역사회의 바람과 그 이미지를 감안해야 했다. 담장이나 덤불로 앞뜰을 둘러싸는 일은 지역사회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했으며,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여겨졌다. '같은 마음가짐(like-mindedness)'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잔디밭이었다. 잔디밭은 이웃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고, 지역사회와의 연대감을 표시하는 수단이었다. 교외의 풍경을 설계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같은 크기로 나뉜 개인 공간을 하나로 묶우서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민주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자신의 공간을 이와 같은 풍경의 일부로 귀속시키는 것은 시민적 의무였다. 사람들은 매년 11월에 PTA에 참가하듯 매주 토요일에는 앞뜰 잔디밭을 깎았다.

 

92쪽

 

잔디 깎기는 커다란 공책을 좌우로 오가면서 똑같은 내용의 녹색 문장을 반복해서 쓰는 일이나 다름 없었다. 앞뜰에 "나는 양식이 있는 주택 소유자다. 나는 중산층의 가치를 공유한다."라는 문장을 쓰고 또 쓴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략)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잔디가 민주적인 의미를 지닌다면, 자연과의 관계에서 보면 지극히 독재주의적인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초기의 무자비하고도 무차별적인 위력 앞에 자연의 풍경은 사라져버리고, 잔디는 사람의 힘에 철저하게 복속된다. 정원에서 잔디밭을 가꾸는 것은 마치 마룻바닥에 왁스를 먹이거나 도로를 포장하는 것처럼 매몰차게 느껴졌다. 정원을 가꾸는 것은 자연과 문화의 중간 지대에서 자연과 무언가를 주고받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잔디밭은 철저히 짓밟히는 자연에 불과했다.

 

잔디를 깎는다는 것은 땅과 함께 일을 한다기보다는 그와 싸움을 벌인다는 느낌이 컸다. 매주 녹색 잔디 군단이 물려오면 나는 무시무시한 기계로 그들과 전투를 벌였다. 정원에 있는 다른 식물들과 달리 잔디는 특별한 이름도, 변화도 발전도 없는 집단으로 취급받았다. 나는 잔디밭을 폭압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잔디 가꾸기와 달리 정원 가꾸기는 우리에게 자연의 방식을 많이 가르쳐 준다. 그것은 땅과 서로 주고받는 우리의 윤리의식을 일깨운다. 정원은 우리에게 그 공간의 각별함을 깨우쳐주고, 에너지-기술-식량 따위와 관련한 우리의 관심을 보다 가까운 곳에서 찾게 해준다. 잔디를 깎는 행위가 썼던 문장을 다시 베껴 쓰는 일이라면, 정원 가꾸기는 매번 새로운 문장을 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창조와 발견의 과정이다. 정원은 자연과 문화가 서로 타협할 수 있다는 비미국적인 교훈을 일깨워준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배를 포기하고 다른 종의 삶을 위해서 우리가 지구를 떠나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중간 지대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정원은 우리가 중도적인 시각에서 자연과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106쪽

 

퇴비는 정원사의 독립을 회복시킨다. 적어도 정원용품 센터와 농약회사로부터는 그렇다. 작물을 생산할 때 정원에서 자연 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냄으로써, 종묘 판매상을 제외하고는 더이상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어진다. 또한 퇴비는 땅을 더욱 기름지게 만들 것이므로, 퇴비를 만들어 토양을 개량함으로써 땅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우리의 오랜 믿음 역시 보다 확고해질 수 있다.

 

164쪽

 

잡초는 낭만주의자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과 달리 야생적이지 않다. 그들은 월계화 계통의 교배장미나 소로의 콩과 같이 문명화된 산물의 하나라고 보는 편이 옳다. 그들은 다른 정원 식물에 비해 정원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좀 더 뛰어날 뿐이다. 정원 식물들이 맛이나 영양, 크기와 외양적인 아름다움을 발휘하도록 개량된 데 비해, 잡초들은 오직 한 가지 방향으로만 진화되었다. 사람들이 흐트러뜨린 공간에서 번성하는 능력만을 줄곧 키워온 것이다.

 

198쪽

 

정원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오늘 잡초를 뽑는다고 해도 내일 그들은 되돌아온다. 당신이 섬멸해버린 진딧물의 다음 세대 무리들은 복수를 위해 곧 몰려온다. 당신이 애써 심은 것들은 조만간 시들어버리고 만다. 정원의 많고 많은 것들 중에서 정원사에게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은 퇴비더미다. 퇴비는 언제고 자연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 이번 계절의ㅏ 죽음과 실패로부터 새봄의 참신한 소생의 희망을 되살려낸다.

 

251쪽

 

묘목원에서 뿌리를 잘라냈기 때문에 나무둥치와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나무를 심은 뒤에 윗부분의 약 3분의 1 정도를 잘라주어야 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나무의 수관 부분이 너무 크면 잎이 필요로 하는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하느라 뿌리에 부담이 된다는 게 상식이다. 낙엽을 떨구는 늦가을에 나무를 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잎이 없으면 물도 적게 필요하니, 봄이 되어 새잎이 돋아나기 전까지 뿌리는 기력을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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