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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섭]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2015)

독서일기/교육

by 태즈매니언 2016. 8. 12.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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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한 솔직함과 자신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빼어난 점이었다. 내 직장의 많은 분들이 경험했을 일에 대해서(물론 이렇게 혹독한 경험까지는 아니었으리라 믿고 싶다.) 알고 싶은 마음에 집어들었다가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걸 얻어갔다. 오랜만에 숭고함을 느꼈다. 그리고 숭고함이란 그 인물이 뛰어난지 여부와 상관없이 삶의 태도에 대한 반응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됐다.

포털사이트를 통해 많은 반향을 일으킨 분이라 접한 분들이 많을텐데 제2부인 <시간강사의 시간>부분을 보며 좋은 수업에 대해 생각할 꺼리도 많이 던져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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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쪽

(발표수업 중에도) 좋은 수업을 하는 교수는 수강생의 발표 수준에 맞춰 그에 따른 피드백을 해준다. 분야의 권위자와 주목할만한 신진 연구자를 소개해주고, 학계의 최신 동향을 일러준다. 어느 부분을 수정하면 어느 학회에 투고할만한 수준의 논문이 될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포착해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교수가 더 많다. 그저 대학원생의 발표에 전적으로 의존해 수업을 진행한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의미 없는 발표가 이어진다. 제대로 된 피드백도 없이 그래 고생했어요 이 책은 다 읽어봐야죠, 하는 식으로 수업이 끝난다. 자신이 장악하지 못한 택스트를 과제로 내고 함께 토론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대학원생의 시각에 끌려다니기도 한다. 이건 아래에서 주도하는 학술 세미나지, 더 이상 학기에 500만원씩 지출하며 듣는 대학원 수업이 아니다.

113쪽

교수들은 종종 학부생들에게 대학원에 올 생각이 없는지 넌지시 묻곤 했다. 하지만 곁에서 대학원생들을 지켜본 학부생 조교들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원을 꿈꾸었던 학생들이 실망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것을 몇 차례 보아왔다. 대학원 신입생이 갈수록 줄어들자 어느 교수는 대학원생들이 선배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니 그런 것 아니냐,고 힐난하기도 했다. 나는 대학원생의 처우 개선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고 올라오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163쪽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에 강의를 보기해보는 버릇이 있는데, 어떤 날은 몇몇 학생의 얼굴만 떠오르고 다수의 얼굴과 이름이 흐릿하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부끄럽고 나쁜 강의다. 반면 어느 날은 모두의 얼굴이, 발언이, 몸짓이 떠올라 전체를 구성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강의다.

182쪽

웹툰은 청소년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고 접근성 쉬운 텍스트 매체다. 하지만 네이버와 다음 등 유명 포털을 통해 서비스되는 웹툰등조차 표준어 문법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 작가마다 편차는 있지만 한 편당 10개에서 100개까지 다양한 오류가 드러난다. 구어체나 관용적 표현을 제외하고 접근해도 그렇다. 하루 이용자만 수백만에 이르는 거대 포털들이, 어떠한 맞춤법 검수도 없이 그저 작가의 개별 역량에 모두 맡기고 있는 셈이다.

193쪽

많은 시간강사들에게 강의는 부족하나마 당장 오늘의 생계를 해결해주는 수단이고, 연구는 내일의 생계를 위한 희망이 된다.그래서 적당히 강의하고 자신의 논문을 한 편 더 쓰는 것이 자신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을 모두가 안다. 강의 준비하는 대신 논문 자료를 한 줄 저 읽고, 과제 천삭을 하는 대신 논문을 한 줄 더 쓰면 된다. 강의실에서도 그저 정해진 교재의 진도를 나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연구뿐 아니라 생계를 위한 다른 아르바이트를 할 여유도 만들어줄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면 대개 '강의>연구'로 기울어진다.

210쪽

"저는 강의를 위한 필기구를 지참하는 것은 교수로서 당연히 가져야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필기구도 없이 강의실에 들어오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중략)
중고등학교 시절, 어떤 선생님들은 칠판 밑에 분필이 없으면 주번을 불러 화를 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좋은 선생님들은 속주머니에서 정갈한 분필 클립을 꺼냈고, 오래 닳아 쓰기 힘든 분필에 보조구까지 달아 판서를 시작했다. 그것은 참 보기좋은 멋스러움이었다.

214쪽

을의 공간은 사람을 무척 작아지게 만들었다. 어떤 말썽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고, 그에 따라 손님에게 최상급의 존대를 해야 했다. 그런데 나 역시 언젠가부터 '빅맥 세트 나오셨습니다.' 하고 있었다. 그 잘못된 문법은 오히려 더욱 자연스럽게 갑에게 가서 닿았다. 그러고 보면 카운터 위에서 갑의 소유가 된 햄버거 역시,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거 아니었다. 갑과 을 사이에 끼어든 '갑의 소유물'은 어떻게든 을보다 높은 자리를 점유했다. 그래서 빅맥세트 나오셨습니다,하고 외치며 갑의 소유물마저 높여주고 나는 그 아래로 자진해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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