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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레드 다이아몬드/강주헌 역] 어제까지의 세계(2012)

독서일기/인류학

by 태즈매니언 2016. 12. 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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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게 가장 좋아하는 학자를 꼽으라면 아마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님이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접한 <제3의 침팬지(1991)>와 <총,균,쇠(1997)>, 졸업무럽 읽었던 <문명의 붕괴(2005)> 모두 생각의 지평을 넓혀줬던 인상깊었던 책이거든요. 생리학에서 출발하셔서 조류학, 인류학, 생태학, 지리학, 진화생물학까지 섭렵하셨고, 십여 가지 언어를 구사하시는 이 시대의 석학이시죠.

다이아몬드 교수님의 최근작 <The World until Yesterday: What Can We Learn from Traditional Societies?(2012)>를 어젯밤 완독했습니다. 이 책은 소위 WEIRD(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and Democratic)들에게 39개의 전통(수렵채집,농경) 부족사회가 체득한 지혜들을 소개하고, 지금 세대와 후손들이 어떤 것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는지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이제 곧 팔순인 석학께서 자신의 손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가르침을 구술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젖떼기와 우는 아이달래기, 놀이도구와 친구, 이중언어 사용, 현대인의 비전염성 질병과 관련된 염분과 당분의 과다섭취와 운동부족 등에 대한 우려 등은 영유아 자녀교육에 관심있는 분들께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거인의 생각이 흘러가는 흐름을 느끼며 쏟아져 나오는 지식의 물줄기세례를 받고나니 복잡한 세상일들이 내는 소음에서 한발 떨어져 편안해져서 좋네요.

인생에서 7%의 시간을 뉴기니에서 보내면서 총천연색 경험을 했고, 나머지 93%의 시간을 회색빛 현대문명지에서 보내며 계속 뉴기니를 떠올린다는 교수님의 소회를 보니 현대인들이 왜 등산이나 캠핑같은 자연을 찾는 아웃도어를 좋아하는지 알겠더군요.(부쉬크래프트매니아나 생존주의자들도 좀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돌을 쪼개 돌칼을 만들어쓰던 뉴기니의 부족민부터 이십대의 미국인인 막내아들까지 타임머신이 개발되기 전까지, 다이아몬드 교수님같은 소수의 인류학자가 아니고서는 수천년 동안 인류가 경험해온 다양한 사회를 자신의 시야에 담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만화가 최규석씨의 <대한민국 원주민>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던 것처럼 저는 아직 삼십대지만 어릴 적에 남도 끝자락의 면단위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농사를 짓는 외갓집이 가깝다보니 수업 끝나고 자주 가서 놀았죠.

초등학교 1학년인 제게 외할아버지는 소나 염소의 고삐를 쥐어주시며 방죽(저수지)에 가서 풀 좀 먹이고 오라고 시키셨고, 일 없으면 놀지 말고 꼴이나 좀 베어오라고 하셨는데 오는 길에 길을 막고 있는 다른 소나 성질사나운 염소때문에 이도저도 못하고 끙끙대던 기억이 나네요.

마을 또래들은 코흘리개여도 다들 제 몫의 일들이 있었고요. 쪽대(반두)를 가지고 놀러가서 농로나 도랑을 쳐서 미꾸리나 드렁허리, 각시붕어, 돌고기, 왜몰개 등을 잡아와서 반찬거리로 쓰거나 닭모이로 던져주곤 했죠. 좀 부지런떨어서 아침 저녁으로 저수지를 한바퀴 돌면 물가로 올라오는 우렁이를 대야 한가득 잡을 수도 있었고, 대나무로짠 닭장에서 족제비한테 물려죽은 닭 잡아먹고 남은 닭뼈 챙겨서 계곡으로 놀러가면 그 날 저녁엔 가재 삶아먹었죠.

수완좋은 친구덕분에 동백씨를 주워모아 머릿기름으로 쳐줬던 동백기름 짜는 집에 팔거나, 솔잎이 수북하게 쌓인 땅을 파서 굼벵이나 사슴벌레 애벌레를 잡아서 한약방가서 팔아서 용돈 벌기도 했었고요.

마을에 살던 삼촌과 이모들이 저를 돌봐주셨고 사촌들이나 동네 친구들하고 놀다보면 하루가 언제 지나가는지 몰랐던 어린 시절 추억을 간만에 떠올려 봤네요.

개인적으로는 종교에 대한 제9장 '전기뱀장어는 종교의 진화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가 주는 통찰력이 이 책에서 가장 좋더군요.

에필로그를 제외한 마지막 장인 제11장 '염분과 당분, 비만과 나태'를 읽으며, 여름철 기온이 높은 벼농사지역이다 보니 뭐든 짰던 반찬들, 광주로 전학와서야 햄버거와 피자를 처음 먹어봤던 기억, 지난번 건강검진 때 확인한 BMI지수와 늘어진 뱃살(시골살 때는 나름 그동네의 풀무치 학살자였는데...) 정상치의 끝단 근처에 있는 혈압수치까지 다이아몬드 할아버지한테 혼나는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물론 애정어린 충고입니다.

참고논문까지 합치면 번역판으로 700페이지가 넘는 책이다보니 들고 읽기도 무겁고 해서 읽는데 좀 오래 걸렸지만 국가사회 이전의 인류집단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그들이 체득한 지혜는 무엇인지, 어떤 것들이 지금 우리에게도 유용한지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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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쪽

전통적인 사회의 보상 과정은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그 후로도 작은 사회에서 평생 얼굴을 마주치며 살아야 할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목적이 있다. (중략) 국가 사회에서는 분쟁 해결 과정이 느린 데다 적대적이며, 당사자들이 그 후로도 만날 가능서잉 거의 없는 서로 모르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분쟁 해결 과정이 관계의 회복보다 잘잘못을 따지는 데 집중되기 마련이다. 또한 국가의 이해관계가 피해자의 이해관계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270쪽

식량이 충분하지 않는 전통 사회에서, 젖을 먹이는 어머니는 젖을 만들어내는 데 많은 열량을 소비하기 때문에 지방 수치가 그 임계값을 항상 밑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수렵채집 사회에서 수유하는 어머니와 달리, 서구 산업사회에서 수유하는 어머니가 섹스를 하면 두 가지 이유에서 임신할 가능성이 높다. 첫째로는 수유의 빈도가 너무 낮아 수유성 무월경을 유도할 정도로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산모들이 영양을 충분히 섭취해서 수유로 많은 열량을 소비해도 체지방수치가 배란을 위한 임계치를 항상 웃돌기 때문이다.

310쪽

수렵채집 사회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그곳의 아이들이 성정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서구학자들과 내가 소규모 사회 구성원들의 정서적인 안정감과 자신감, 호기삼과 자주성, 조숙한 사교능력에 충격을 받았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략)
수렵채집 사회를 비롯한 소규모 전통 사회에서 살았던 서구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에 따르면, 그곳의 아이들이 양육되는 방법 덕분에 그런 부러운 자질들이 발달하는 것이다. 즉 긴 수유 기간, 오랫동안 부모 옆에서 잠을 자는 풍습, 대리 부모를 통해 아이에게 훨씬 많이 제공되는 사회적 본보기들, 돌봄이들의 끊임없는 신체 접촉을 통한 사회적 격려, 아기의 울음에 대한 돌봄이의 즉각적인 반응, 체벌의 최소화 등의 결과로 그곳 아이들이 얻는 정서적 안정감과 격려가 그런 자질들의 근원적인 힘이다.
(중략)
1만 1,000년 전, 국지적으로 농업이 도래하기 전까지 전 세계인이 수렵채집인이었고, 5,400년 전까지는 누구도 국가 정부 하에서 살지 않았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실험해서 얻어낸 양육법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415쪽

내 미국인 친구는 뉴기니에서 수렵채집으로 살아가던 새로운 무리사회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만나려고 지구의 절반을 날아갔지만, 그들의 절반이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이유로 이미 인도네시아의 한 마을로 이주해 티셔츠를 입고 지내는 모습을 보았을 분이다. 그들은 "먹을 쌀이 있고, 모기가 없다!"라는 말로 이주한 이유를 짤막하게 설명했다고 한다.

483쪽

종교는 흔히 다섯 가지의 속성을 지녀야 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1)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 2) 사회운동이라 생각하며 그 운동에 동참하는 회원들, 3) 비용이 많이 드는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줘야 하는 헌신, 4) 행동을 실질적으로 규제하는 규칙들, 5) 초자연적인 존재와 힘을 현실의 삶에 개입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540쪽

위험으로 무릅쓰고 종교를 다른 식으로 정의한다면 나는 이런 정의를 제안하고 싶다. "종교는 어떤 특성들의 집합체로, 그 특성들을 공유하는 인간 집단과, 그 특성들을 똑같은 형태로는 공유하지 않는 인간 집단을 구분한다. 특히 세 가지 특성-초자연적인 설명, 통제할 수 없는 위험에서 비롯된 불안감의 완화, 고통스런 삶과 예견된 죽음에 대한 위안의 제공- 중 하나 혹은 그 이상, 때로는 세 가지 모두가 언제나 공유돼야 한다. 초기 단계 이후에 종교는 규격화된 조직, 정치적인 순종, 자신과 같은 종교에 속한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는 아량, 타종교를 믿는 집단과 벌이는 전쟁의 정당화를 꾸준히 지원해왔다."


646쪽

혈액에서 포도당 농도가 조금이라도 올라가면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인슐린을 신속하게 분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인슐린을 신속하게 분비하도록 명령하는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은, 음식물로 섭취한 포도당이 소변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혈액의 농도를 높일 틈도 없이 포도당을 지방으로 격리할 수 있다. 때때로 식량이 풍부할 때 이런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은 음식을 한층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지방을 저장하고 신속하게 살을 찌운다. 따라서 그 후에 닥치는 기아의 시기를 한층 여유롭게 이겨낼 수 있게 된다. 이런 유전자는 풍요와 기아가 예측할 수 없이 반복되던 전통적인 생활방식에서는 유익했겠지만, 현대 세계에서는 비만과 당뇨병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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