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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스미스/노시내 역] 일본의 재구성(1998)

독서일기/일본

by 태즈매니언 2017. 3. 2.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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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묵님 덕분에 훌륭한 책을 한 권 더 읽었습니다. 중국에 대해서 애번 오스노스가 쓴 <야망의 시대>, 피터 헤슬러의 <컨트리 드라이빙>처럼 통찰력있는 이방인 기자가 자신이 체류한 나라를 예리하게 관찰한 모범적인 책입니다. 저자 패트릭 스미스는 20년 가량 아시아 특파원으로 일해왔고 1987~1991년에 해럴드 트리뷴의 도쿄 지국장으로 일본에 체류했더군요.

비록 이 책이 1998년에 출간되었지만 거의 20년이 지난 시점인 지금 읽어도 여전히 타당한 분석이라는 게 일본의 비극인 것 같습니다.

업무상 일본 법을 찾아볼 일이 종종 있는데도 일본국 헌법(소위 '평화헌법')이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고 올해까지 70년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저자 패트릭 스미스 덕분에 평화헌법 제9조에 대한 개정 논의에 대해서 아베 신조가 A급 전범 용의자인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라는 딱지까지 붙여가며 '정상국가화'라는 개헌파의 주장을 매도하는 한국과 중국의 민족주의 진영의 주장에 대해 마뜩찮아 하면서도 전쟁책임 인정에 소극적인 극우의 손을 들어주기는 했던 애매함을 후련하게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태평양전쟁 항복 후 미국이 대신 만들어준 헌법을 70년 동안 계속 사용해왔던 국민들이 불쌍하고 극악인 일본 정치인들의 리더쉽이 한심해서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아무리 헌법과 민주주의를 가르쳐봐야 뭐하나요? 1920년대의 짧았던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태평양전쟁 종전 직우 몇 달을 제외하고 주권자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권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도 없었는데요. 우리나라의 1987년처럼 강렬한 체험은 아닐지 몰라도 외국의 간섭없이 내부적으로 헌법을 개정해보는 경험을 해보길 바랍니다. 저자의 말처럼 일본인들이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권리도 있다고 보고요.

요시다 시게루와 기시 노부스케가 틀을 짠 일본주식회사와 미일안보조약 시스템이 그 수명을 다한 이후에도 나카소네 야스히로,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시스템 개편이 실패했는데 아베 신조의 이번 시도는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송민순 전 장관의 <빙하는 움직인다>를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이 제1,2차 북핵위기에 대응하는 6자 회담에서 일본 외무성이 보였던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한 집착이 참 바보스러워보였거든요. 일본과 비슷한 입장이었던 러시아가 국외자로서 객관적으로 살펴보면서 종종 통찰력있는 조언을 해주던 것과 비교되더군요.

읽으면서 일본이 유럽의 독일과 같은 존재가 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미국에 종속된 존재로 남아있는 덕분에 한국이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자율성을 누려온 측면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만약 일본의 정치인들이 일본의 정상국가화에 성공한다면, 미국은 더 이상 지금처럼 일본을 지시나 푸대접으로 별생각없이 다룰 수 없겠죠. 그렇게 되면 일본의 하위버전인 한국이 그동안 일본이 맡아왔던 역할을 담당해야할 것이고,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제주도로 옮겨올 수 있겠죠. 제가 바라는 상황은 물론 아니지만 우리를 위해 일본이 계속 이대로 미숙한 상태로 남아있으라고 저주를 내리기는 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읽었던 일본에 대한 서구학자들의 책들이 이 책에서 비판하는 소위 '국화회' 의 시각이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만주침략부터 태평양전쟁 종전까지의 시기를 일시적인 일탈로 보고, 일본의 아름다운 '전통'과 미국이 이식한 민주주의가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 잘 착근이 되었다는 시각말이죠.

역자 후기에서 번역자 노시내씨가 술회한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패트릭 스미스의 지적이 일본이 아닌 한국에도 정확히 해당하는 내용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개인성을 억누르고 집단에게 극도의 충설을 바치는 무사 전통, 봉건주의, 계급의식, 외국인 차별, 지역차별(제주도나 전라도차별과 부라쿠나 오키나와 차별에 비교하면 아주..), 텐노와 궁내청(아키히토 천황의 자진 퇴위에 박수를~),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한 '개인성의 충분한 발현이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며,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에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해야한다'는 탁견이 패트릭 스미스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일본이 개인들의 '공적 개성'을 인정하는 근대국가가 되기를 기원하는 애정이 담겨있지요.

이 책에서 인용한 나쓰메 소세키의 강연 중 '제가 말씀드리는 개인주의라는 것은 타인의 존재를 존중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중략) 나는 나의 길을 마음대로 갈 뿐이고, 동시에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 나름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때로는 불가피하게 인간들이 뿔뿔이 흩어져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고독한 것입니다.'라는 말도 같은 맥락의 지적이고요.

일본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줬고, 일본이라는 거울에 한국을 비춰볼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습니다. 이웃나라 일본이 여행가기 좋은 나라뿐만 아니라 이민가고 싶어지는 나라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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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쪽

맥아더는 일본 평화 헌법을 총사령부의 기념물로 삼고 싶었다. 일본 평화 헌법은 맥아더가 필리핀 방어 임무를 수행하던 1935년에 미국 헌법을 본따 제정된 필리핀 헌법을 모델로 한 것이다.

65쪽

과거 요시다 협정이나 현재 일본이 서방 안보 협조체제 내에서 처한 위치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했다. 걸프전에 대해 도쿄가 보여준 어설픈 행동은, 부분적으로는 미국이 일본에 만들어준 법 때문이라는 사실을 미국 정부에서 까마득히 잊고 지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일본 정부 관료들은 또 그들대로, 예의상 그와 같은 사실을 드러내놓고 지적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지 오래됐다.

351쪽

731부대는 세균전 부대로, 다른 부대와는 달리 유일하게 텐노의 칙령으로 설치가 허가되었다.

406쪽

일본사회에는 외로움이 만연해 있다. 일본에 정착하는 사람들은 금방 느낀다. 일본인이 된다는 것은 혼자가 됨을 뜻한다. '타자'로부터 단절될 뿐 아니라 각 개인의 내면에서 남에게 보여주는 자기와 진짜 자기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다. 일본인이 스스로를 너무도 철저하게 타자화해왔기 때문이다.

420쪽

부락민의 옛 선조는 동물이나 사람 시체와 관련이 있었다. 동물을 도살하거나 가죽을 무두질하거나 무덤을 팠다. 신토 신앙은 그런 일을 불결함의 상징으로 보았고 부락민의 지위는 그런 시각의 반영이었다.

453쪽

극우가 역사를 부정하고 역사적 책임을 부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말에 좀더 귀기울여볼 피룡가 있다고 나는 느낀다. 백발이 된 노병들은 비록 꺼림칙한 방법으로 표현할지언정 여전히 자존심, 주권, 일본인다음 같은 관념을 지니고 있다. 오직 극우만 홀로 그런 관념들을 대변하면서 희화시키는 현 상황은, '국제주의자'들이 이 부분을 포기해버린 탓이기도 하다.

480쪽

일본은 내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하되 대외적으로는 자신과 외국이 다르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역설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일본이 이런 사고에 능숙해지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국가적 목표를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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