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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최세희 역]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2011)

독서일기/유럽소설

by 태즈매니언 2017. 1. 30.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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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 지금은 페북을 접으신 것으로 추정되는 예전 페친님께서 격찬하신 소설입니다. 과연 문학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빼어난 작품이더군요. 바로 전에 읽었던 국내 유명 작가의 신작이 실망스런 태작이어서 다시는 이 사람 소설은 찾아보지 말아야지 다짐할 정도의 내상을 입었는데 치유가 잘 됐습니다.

 

어제 밤늦게 다 읽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말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듯 얼떨떨했습니다. 책을 덮을 때 내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읽었다 싶었거든요. 그래서 잠자고 읽어나 다시 한 번 읽었네요. 다시 읽지 않고 배길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줄리언 반스는 에이드리언 핀의 입을 빌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는 말로 가상의 인용처리를 합니다. 이 책의 주제가 되는 문장이죠.

 

두 번째 읽으며 당사자 본인의 증언이 없더라도 에이드리언 핀의 결단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부정확한 기록들을 꽤 찾을 수 있었습니다.(제 독해력이 이 소설을 겨우겨우 이해할 정도라도 돼서 다행입니다.) 헌트 선생의 역사학자들에 대한 변호가 일리가 있었던 셈이죠.

 

같이 살아갔던 친한 개인에 대한 기억과 예감도 이리 부정확한데 그러한 개인들이 연쇄사슬처럼 얽혀있는 역사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고 내 분석이 맞다고 뿌듯해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인가 싶어 울적해지네요. 제가 관심 있고 좋아한다고 생각해온 역사가 무엇인지 그 바탕부터 다시 생각하게 해준 좋은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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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완전한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 그래야 모두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책임의 고리 하나하나는 모두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모두를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슬이 긴 건 아니죠. 하지만 물론, 책임소재를 묻고자 하는 저의 바람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공정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제 사고방식의 반영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중점적인 문제 아닌가요, 선생님? 주관적 의문 대 객관적 해석의 대치, 우리 앞에 제시된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가가 해석한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101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162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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